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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시간의 실 가닥'을 이동하면서 전쟁을 펼치는 에이전시와 가든. 그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그들은 만난다. 레드와 블루. 몸을 맞대거나 서로를 바로 눈 앞에서 응시했다거나 하는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애브러개스트882에서 벌어진 난장판을 처리하다가 처음 둘의 눈길이 마주쳤던 그 순간. 그들은 상대의 진영에 자신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처음 편지를 보낸 것은 블루였다. 그 한 통의 편지가 모든 것의 시작.
상대를 부르는 이름이,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의 편지를 통해 깨닫는다. 처음 레드에게 있어 그저 '나의 가장 사특한 블루'였던 블루는, 이내 친애하는 블루다바디가 되고, 무드 인디고를 거쳐, 가장 아끼는 색상 코드 0000FF를 지나, 가장 아끼는 청금석이 된다. 레드도 마찬가지. 전투의 현장에서 어쩌면 블루가 죽여야 할 지도 모를 레드는, '이빨도 발톱도 피로 물든 레드'였으나 완벽한 빨강이 되고, 조심성 많은 홍관조였다가, 소중한 미스코완제로, 진주보다 훨씬 더 값진 현숙한 빨강, 소중한 사탕단풍, 저물녘 서쪽의 하늘빛, 딸기, 라즈베리, 그리고 자신의 심장에 흐르는 피가 되었다. 세상은 이제 상대의 색만 그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이 주고받는 편지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속 신경이 파르르 떨리는 기분이지만, 이렇게 서로를 부르는 이름들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질만큼 애틋함이 전해져온다.
편지를 주고받는 방식 또한 어찌나 독창적이고 감미로운지. 그들의 편지는 읽기도 전에 불길 속에 사그라들고, 나이테 한칸 한칸에 새겨져 있었으며, 하프 물범의 가죽 바탕에서 떠오른다. 솟구치는 용암의 붉은색 속으로 검은색과 황금색이 잎맥처럼 뻗어나가며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 매듭으로 이어진 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언제 어느 때 상대로부터 서신이 도착할지도 모르는 상황. 이제 그들은 위협하듯, 도발하듯, 그렇게 상대의 편지를 기다리다가, 이내 편지 교환이 얼마나 위험한지 대표하는 인물들이 되었다.
지난번 편지에 시간의 실 위쪽에서 나와 함께 살면 어떨지 적었지. 친구나 이웃끼리 함께 사는 식으로. 그 생각을 어찌나 간절히 했던지, 내가 사는 이 골짜기를 통째로 삼켜도 허기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그 대신 나는 내가 느끼는 갈망을 실로 자아서 너라는 바늘의 눈에 끼우고, 내 살갗 아래 어딘가 꿰매어 감춰 뒀어. 너에게 쓰는 다음번 답장을 그 실로 한 땀씩 수놓으려고.
p 146
소설이라기보다 한편의 시에 가까운 소설이다. 초반에는 다소 낯선 설정에 어리둥절했다가, 이야기에 잠식당하는 순간부터는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다는, 무력하면서도 매력적인 유혹에 미소짓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줄기를 오르내리면서 상대를 주시하고,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커져가는 감정, 그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상대를 죽일 수도, 구할 수도 있는 감정. 그 마음 하나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애초에, 우리는 알고 있지 않았던가. 편지를 주고받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얼마나 애틋한 일인지. 그리고 사랑에 빠진 이들은 시를 쓰게 된다는 것도.
그저 상 좀 많이 받은 그런 작품인 줄 알았다가 어느 순간 문장에 압도당했고, 결말에 가서는 책을 품에 안을 수밖에 없었다. 읽어야 할 다른 책이 바로 앞에 놓여 있었지만 손이 나아가지 않는다. 결국 나의 선택은 이 책을 다시 처음부터 읽는 것. 올해의 남은 기간 중 이 책만 내내 읽어도 좋겠다. 지금까지 읽어온 다른 소설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올해 압도적 1위가 될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