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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로리 - 새장 밖으로 나간 사람들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21년 8월
평점 :

어느 날 갑자기 뒤집혀버린 세상. 보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본 사람들은 미쳐버렸고, 미쳐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자신을 죽였다. 그 무언가를 보게 된 것이 세상 가장 큰 행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 평화롭게,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지옥을 현실에 구현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수단은 안대로 눈을 가리는 것 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쉽게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된다. 온갖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 아들을 낳고, 어른 올림피아가 남긴 딸 올림피아를 친딸처럼 키우며 터커 맹인학교에 다다랐던 맬로리. 그러나 크리처들은 이 곳마저 잠식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또다시 지옥으로 변해버린 삶의 터전을 벗어나 다행히 안전한 캠프장을 발견해 10년을 살던 어느 날. 이번에는 부모님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맬로리를 위협한다. 이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또다른 함정?!
영화 <버드 박스>에서 전해져오던 숨막힐 듯한 긴장과 공포가 여전히 생생하다. 절대 앞을 봐서도, 소리를 내서도 안되는 세상. 약간의 방심은 생명을 잃는 결과를 낳는다. 생필품도 모두 떨어지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뿐인 세상에서,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을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현실. 맬로리에게 바깥 세상은 두려움과 위협으로 채워진 곳이었지만, 이제 10대에 접어든 톰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늘 '안돼'라는 말만 하는 엄마와 달리, 저 바깥은 온전히 자신을 긍정해줄 것만 같은 느낌. 10대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호기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맬로리와 부딪히는 톰도 이해가 되고, 엄마로서의 맬로리도 너무나 이해되어 마음 아픈 장면들이 특히 많았다. 아들아, 그래도 엄마는 이 세계에서 너를 키웠어. 그걸 잊으면 안돼.
동굴 속에만 갇혀 지내던 맬로리를 바깥 세상으로 인도한 것은, 인구조사원이라 지칭하는 한 남자가 두고 간 기록물. 생존자 명단에서 부모님의 이름을 발견한 맬로리는 미칠듯한 허무와 희망에 시달리다 결국 부모님을 찾아나서기로 결심한다. 순간순간 밀려드는 후회와 자책. 캠프장을 떠나는 게 아니었어. 아이들을 다시 위험으로 내모는 게 아니었어. 그럼에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족이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세상의, 맬로리가 행복한 맬로리로 있을 수 있도록 추억을 전해준 부모님이었으니까.
제목이 '맬로리'라고 지어진 것에 깊은 의미가 있다. 캠프장에 숨어 죽음을 기다리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위험을 감수하며 다시 밖으로 나온 맬로리는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새 같다. 모든 감정을 절제하고 오직 아이들과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며 살아온 그 오랜 시간. 분노를 느끼는 것조차 사치였을지도 모를 그 시간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맬로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
네 앞에 있는 이 여자? 이건 내가 아니야! 어둠 속에 살고, 감은 눈 뒤에서 울부짖고, 17년 동안 사는 낙이라곤 몰랐던 이 여자. 이건......내가 아니야.
p 344
그리고 어쨌든 세상은 변했다. 맬로리가 죽어도 톰과 올림피아는 살아가야 한다. 갇혀버린 시간 속에서 화석처럼 굳어가던 맬로리는, 아이들을 위해 변한 세상 속으로 이제야 드디어 한 발 내딛는다. 마침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아이들과 함께.
스릴러고 공포소설에 속할 이야기인데 맬로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녀가 드디어 세상을 '마주볼 수 있게' 되어 나 또한 약간은 안도한다. 어디선가 따뜻한 한줄기 햇살이 비치는 것만 같은 느낌의 결말. 17년이라는 긴 여정. 이 이야기는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북카페 '책과 콩나무'를 통해 <시공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