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병 -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됐지만 투병은 내 맘대로
윤지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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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동네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 유명한 병원 세 군데를 돌고난 후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한 병원에서 시티 검사를 했고, 위암 3기 정도 된다는 진단 후 수술 날짜를 잡았다. 개복 후 들은 진단명은 위암 4기. 말기였다. 위암 4기 환자의 1년 생존율은 7%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항암 치료를 받다 악화되거나 수술을 해도 재발, 전이로 고생하다 사망한다고 한다. 봄 햇살을 연상시키는 똥꼬발랄한 표지 속에 이런 내용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나는 그저 한바탕 눈물 흘리며 웃을 수 있는 그런 에세이나 만화인 줄 알았다. 사기병-이라는 제목에서도 '사기? 사람 속이는 그 사기?'를 먼저 떠올렸기에 페이지를 펼친 순간부터 강타한 충격에 잠시 얼어붙고 만다.

 

그녀의 투병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병으로 소중한 사람을 먼저 보낸 사람, 현재 투병하고 있는 사람은 물론 건강한 사람도 이 책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차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나에게 이 책이 남일 같지 않게 여겨진 것은, 그녀의 일상이, 그녀의 나이가 나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와 불과 한 두 살 차이인 그녀는 위암 진단을 받을 당시 두 돌 아기의 엄마이자 한 남편의 아내, 사랑하는 부모님의 딸이었다. 그림책에 그림을 그리고, 무민 캐릭터와 SF 영화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책 이야기를 즐겨 하며, 아이를 재우고 웹툰을 보며 피로를 풀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여자 사람.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집안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다가 아이를 하원시켜 저녁을 준비하는, 나와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불쑥 닥친 위암 진단 소식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기병]에는 작가가 위암 진단을 받은 후의 모든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태어나 처음 겪는 고통스러운 수술의 통증과 죽지 못해 살아야하는 심정으로 겪어야 했던 항암과정. 발병하고 난 후 친정과 시댁 부모님들의 도움에 관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반지와 무뚝뚝하지만 묵묵하게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는 남편에 관한 이야기들. 항암과정이 얼마나 길고 힘겨운지 토로하면서도 바람 한 줄기, 따스한 햇빛, 잠시라도 즐길 수 있는 산책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쏟아낸다. 아프고 난 뒤 자신이 보내던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모든 일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닌데 뭐 그리 심각하냐며 자신이 얼마나 너그러워졌는지에 관한 담담한 일화들. 수술 후 먹는 것 하나도 조심해야했던 그 시간들을 들여다보며 따스한 커피 한 잔,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역시나 나는, 아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는 여지없이 통곡을 하고 말았다. 어쩌면 아들의 미래에 내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미안함이, 두 곰돌군을 키우는 나에게는 정말 내 일처럼 가슴 속을 파고들어 아프게 찔러댔다.

힘든 투병 과정 속에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은 윤지회 작가님. 그림을 그리면서 비로소 자신을 찾은 것 같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더 작가님의 등을 토닥토닥 해주고 싶어졌다. 더불어 그녀를 마주하니 내가 요즘 불평불만하는 일상이, 이렇게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시간임을 눈이 번쩍 뜨이도록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같이 투병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안타까움과 내일의 희망을 알려주는 작은 거인. 그 작은 거인의 암이 다시 재발했다. 올해 9월 난소로 전이된 암세포. SNS를 찾아가보니 이미 수술을 마치고 항암의 과정에 있는 것 같다. 부디 그녀가 힘을 내어주기를.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응원하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가족, 특히 소중하고 소중한 아들 반지와의 미래를 포기하지 말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작가님, 힘내시라는 말밖에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힘내세요! 꼭 건강해져서 몇 년 후에는 완치됐다는 피드를 보고 싶어요. 반지 옆에 있어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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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세 시대가 온다 - 실리콘밸리의 사상 초유 인체 혁명 프로젝트
토마스 슐츠 지음, 강영옥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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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생각하는 '장수'란 몇 세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는 100세 정도였다. 그 100세도 건강하게 살 수 없다면 평균수명인 7,80세까지만 살아도 많이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그려봤었다. 그런데 100세도 아니고, 150세도 아닌, 200세라니.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치다. 도대체 인간이 그 나이까지 생존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지금의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몇 십년 전만 해도 마트에서 물을 사먹게 될 줄도, 걸어다니면서 메시지를 보내거나 언제 어디서든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소통하게 될 줄도, 사람들은 몰랐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혁명. 그 진보가 이제는 수명연장에 손을 뻗어 건강하게 200세까지의 삶을 지원하게 된다는 것. 어쩌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200세 시대가 온다]의 토마스 슐츠는 실리콘밸리의 비밀 연구소들을 찾아 의학 연구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취재했다. 불치병이 정복되고 맞춤 아기가 가능해지는 시대, 장기를 교환하면서 인간이 200세까지 살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병과 노화의 개념은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그런 시대에서 의료와 보건 시스템의 역할은 어디까지 확장되고 구분될 것인지, 그런 신기술을 맛볼 수 있는 계층은 한정적일텐데 그런 세상에서 법과 윤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혁명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그 거대한 변화 앞에서 인간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총체적 보고서라고 할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어 그 현실성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다.

 

의학 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실리콘밸리다. 기존의 의학기술과 병합된 IT 기술. 병원에서 인간 의사가 아닌, AI 의사를 마주할 날이 머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연장시키고 개인 스케줄을 관리해서 건강을 체크할 수 있게 하는 시대. 과연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런 시대를 맞이하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시대가 과연 좋기만 할 것인지 가슴 한 쪽에서 피어오르는 걱정과 두려움도 배제할 수 없다. 평소 이런 종류의 책을 잘 읽지 않아 쉽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모르는 한쪽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마주하게 된 기분. 그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금방이라도 밀려올 것 같아 숨이 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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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1 - 전쟁의 서막
김진명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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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만 수나라 대군을 고구려 군사들이 물리친 이야기, 살수대첩. 역사책에서도 살수대첩과 을지문덕이라는 단 몇 줄에 불과한 지식으로만 접했던 그 위대한 전투가 작가에 의해 생생하게 눈 앞에 나타났다. 우리의 역사를 마치 자기네 것인양 편집하기 위해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도, 중국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 역사왜곡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대비하고 있을까.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논리적 근거를 댈 수 있는 것.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잘못된 사실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전문적인 역사적 지식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최고의 방법이겠지만, 이렇게 역사를 토대로 집필된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 한 켠에 살아있는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도 묘수가 아닐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늘 헷갈리게 하는 작가의 을지문덕과 살수대첩에 관한 장대한 서사가 개정판으로 다시 찾아왔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낼 생각과 배포로 수나라의 전략을 꿰뚫어보고 오랜 시간 전쟁을 준비해 온 을지문덕 장군. 그는 이 작품 안에서 기인으로 그려져 있다. 칼이나 창을 들고 전장을 누비는 전투의 신이 아니라 저 앞까지 멀리 내다보며 상대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고 모든 상황을 가늠하는 인물. 마치 태산과도 같은 무게감으로 행동거지 하나, 말 하나 모두 허투루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은 수나라 양광. 지략과 무예를 갖췄지만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는 그 능력을 시샘당하고, 사랑하는 여인마저 권력에 의해 잃고 만다. 흡사 미치광이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내면 역시 보통 사람은 짐작할 수 없는 분노와 울분, 절망으로 얼룩져 있다. 그런 두 사람의 대결. 두 나라의 전투.

수나라가 고구려를 그토록 견제하고 미워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천하가 인정하는 사서오경 중 하나인 <시경>을 언급한다. 서주에서부터 춘추시대까지의 시들을 모은 것으로 공자도 가장 중요한 고전으로 꼽았고 틈날 때마다 <시경>을 가르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시경>에는 '한혁편'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한후'라는 인물은 조선의 지도자로 단군이라고도 일컬어진다. 한후라는 인물이 서주 왕실을 방문했을 때 환대했다는 내용과 서주가 조선이 추와 맥 지방을 다스리도록 허용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는 곧 추와 맥 지역이 서주와 조선의 국경이라는 이야기로 추와 맥 지역은 당시 중원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고구려의 모태인 조선이 이미 중원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이야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시경>을 직접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작가는 여러 사료를 검토하며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중원을 통일한 양견이 단 하나 손에 쥘 수 없었던 나라, 고구려. 그 고구려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역사다.

작품은 살수대첩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 마침내 시작된 전투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대격돌을 위해 을지문덕 장군이 쌓아왔던 준비들, 전투에 임하는 개개인의 사정, 실감나는 전투 이야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가독성을 높인다. [살수]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 우리 국민이 있을까. 한참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다가 요즘은 살짝 수그러들어 '유니클로' 매장을 찾는 사람들이 또 늘어난다는데,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지켜왔는지 다시 한 번 새겨볼 일이다. '동방 군자국 후예'로서 부디 우리 스스로에게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기를. [살수]를 통해 자긍심과 긍지에 불을 지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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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 과학.문화.미래 편 - 불통不通의 시대, 교양을 넘어 생존을 위한 질문을 던져라 차이나는 클라스 3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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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을 살찌우는 이야기들]

'저게 뭐지?' 하며 시청하기 시작했던 프로그램이 이제는 한 채널의 대표 교양 프로그램이 되었다. 1편에서 <국가, 법, 리더, 역사>를, 2편에서 <고전, 인류, 사회> 에 대해 물었다면 이번 책에서는 과학과 문화, 미래에 대한 질문과 답이 대화 형식으로 실려 있다. 예전에는 방송도 꽤 챙겨 보았지만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거의 TV를 보지 않다보니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었는데 이렇게 책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어 반갑다. 일반 교양서에서 다루었다면 다소 까다롭고 어렵게 느껴졌을 지식들이 TV에서 각 명사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는 형식 그대로 책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층 이해하기 쉬웠다는 것도 이 책이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야기의 문을 여는 소재부터 흥미롭다. 고고학이 아닌 고인류학. 고고학과 달리 고인류학에 필요한 화석은 천운이 따라야 발견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99퍼센트는 죽은 뒤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면 무엇이든 흔적이 발굴되겠지만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니 연구하기 그리 쉽지 않은 학문일 것이다. 우연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은 이 학문에 대해, 대한민국의 고인류학 박사 1호인 이상희 박사가 고인류학이란 무엇인지, 화석을 인간으로 판단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지, 지금의 우리는 언제 등장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이야기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었다. 그 뒤를 잇는 유전자 혁명, 노화도 치료가 되는가, 면역에 관한 이야기는 평소 관심을 갖지 않던 부분이라 다소 낯설면서도 신기하게 읽었다. 아무래도 우리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부분이라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외에도 미래 편에서는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포노 사피엔스, 로봇과 인간의 관계, 민족과 국민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책에서 가장 정신 차리고 바짝 읽은 부분은 <2장 문화>편이다. 요즘들어 특히 음악과 명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길 바라는 마음이 커진 덕분이다. 나도 클래식을 듣거나 명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깊이있게 공부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지라,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에서 접하면 나보다는 좀 더 재미있게 수준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인 것이다. 덕분에 양정무 교수가 들려주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무엇이 다른지, 어두운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의 이야기, 우리가 미술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미술의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은 누구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신동흔 교수의 '엣날 이야기'와 관련된 강의도 인상깊었는데 옛날 이야기의 현실 반영성, 옛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자세 등도 흥미로웠다. 조은아 교수가 들려주는 교향곡과 오케스트라 이야기도.

주제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있고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들이었다. 마음과 정신을 살찌우는 이야기라고 할까. 사실 차클의 앞 두 권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번 책을 읽고나니 앞의 두 권도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는 선선해지고 사고 싶은 책은 많아지고. 이번 가을은 차클을 시작으로 인문 교양 서적을 좀 더 읽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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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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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후유증으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전직 정신과 의사 애나. 그녀의 취미는 별거하는 남편 에드와 올리비아와 통화하기, 인터넷으로 심리상담해주기, 밤 새워 고전영화보기, 그리고 카메라로 이웃집 훔쳐보기이다. 카메라 안에는 자신들도 깨닫지 못한 이웃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어느 날 207번지로 한 쌍의 부부와 아들이 이사오고, 묘하게 신경을 끄는 그들의 집을 엿보던 애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들과 교류하게 된다. 비록 자신의 집 안에서 뿐이지만.

 

다소 강압적이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아버지, 활달하고 사랑스러우며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어머니, 모범적이고 순종적인 아들. 어머니와 아들이 아버지에게 억압당하며 생활한다고 철썩같이 믿는 애나는 기꺼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들인 이선에게는 모성애마저 느낀다. 그리고 목격한 207번지의 살인사건. 그녀는 사고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밖으로 나가기를 시도하지만 허무한 미수로 그치고,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병원으로 실려간다. 퇴원 후 듣게 된 충격적인 상황. 살해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이선의 어머니라 나타난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다! 경찰은 오히려 애나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빨리 망상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한다. 술과 약을 함께 먹어 정말 헛것을 본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만나고 이야기한 그녀는 누구인가. 나는, 그 사고 이후로 미쳐가는 것인가.

 

데뷔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압도적인 스릴러가 등장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성이 우연히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심리 스릴러. 다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지만 그럼에도 독자를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독자들도 애나를 완벽하게 믿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하루종일 밖에 나가지는 않고 온종일 체스를 두거나 밤새워 고전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으로 심리상담을 해주는 여성. 게다가 그녀는 약을 술과 함께 복용하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녀가 남편 에드, 딸 올리비아와 전화통화를 한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도무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버려야 할 지 모르겠는 상황인 것이다. 결론은 둘 중 하나. 애나의 망상이거나, 누군가 살인사건을 없었던 일로 꾸미려 한다는 것. 진실을 찾아 헤매는 애나의 모습은, 마치 동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누군가의 몸부림 같다.

 

시종일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읽어내려가다가 결말 부분의 반전 부분에서는 숨을 헉! 몰아쉬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 급변하는 전개. 마치 내가 애나가 된 듯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다. 그 와중에 밝혀지는 애나의 사고 진실. 으아,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내가 애나였어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과거를 품고 단 하루도 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라도 술과 약을 함께 먹었을 테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어둡고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둠이 선사하는 분위기가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작품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화가 가리키는 사건의 이미지들 또한 절묘하고, 스릴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밝은 대사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꽤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부디 이 작가의 기억할만한 첫 여정에 동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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