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3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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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스또이 만년의 역작!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근본으로 하는 그의 사상을 만나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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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3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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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스또이 만년의 역작!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근본으로 하는 그의 사상을 만나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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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옥 - 노비가 된 성삼문의 딸
전군표 지음 / 난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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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죄를 저질렀다 한다. 새로 왕위에 오른 임금 대신 그 임금이 몰아냈던 어리고 여린 왕을 다시 복위시키기 위해 역모를 꾸몄다고 한다. 어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비는 참형을 당했고, 역모를 꾸민 집안의 남자들이 맞는 운명이 으레 그러하듯 할아버지와 삼촌들을 비롯해 성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집안의 남자들은 전부 살아남지 못했다. 목숨을 부지하게 된 여자들은 모두 노비로 가야하는 참담한 상황 앞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자결했다. 남은 것은 효옥 자신과 그녀를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순심,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바우가 전부. 소녀는 일단 살아내고자 한다. 그 누구보다 곧은 의지와 삶에 대한 열정으로.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아비가 살아남으라 일렀으니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피의 역사는 조선사에서도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다.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어린 조카를 귀향보내고, 그를 중심으로 역모가 꾸며질까 염려한 나머지 끝내는 짧은 생을 끝내도록 한 무자비한 삼촌. 수많은 사람이 흘린 피를 딛고 왕위에 오른 그였기에, 드라마나 소설의 중심은 항상 수양대군의 몫이었다. 하지만 [효옥]의 작가인 전군표님은 죽음으로 그의 앞길을 막고자 했던 사육신과, 살아있었으나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지 않았던 생육신의 이야기를 표면에 두었다. 특히 사육신 중 하나인 성삼문의 절개를.

 

 

손톱 밑에 조그마한 가시 하나만 박혀도 아프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성삼문이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은 그 독하고 모진 고문을 어찌 참아내고 견뎌냈을까. 혹독한 고문 앞에서도 세조를 나으리나 족하라고 칭하며 마지막까지 굽히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런 충심의 가치를 세조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욕심이 났던 것이리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이겠다는 마음. 고통을 당하면서도 쇳덩이가 식었다며 인두를 다시 달구어오라고 일갈하는 그들의 모습에 술렁이는 가슴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한 후 혼자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던 효옥. 노비로 전락한 신분도 차마 그녀의 영특함과 고귀함을 가릴 수는 없었다. 아비가 원했던 세상, 새 임금이 만들어가고 싶어하는 그 세상의 한줌 도움이 되고 싶어 발버둥쳤던 여인. 비록 가냘픈 여인의 몸이었지만 굳건한 의지와 형형한 눈빛으로 뜻을 이루고자 했던 한 여인이 여기 있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도 분명 있겠다. 특히 마지막 장면. 효옥과 예종, 그리고 사육신들을 너무나 애정했던 작가의 소박한 바람이라는 생각 아래 정확성을 따지지 말고 그냥 눈감아도 좋겠다. 바람은 뜨거운데, 책을 읽은 나의 마음 속에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가슴 속에 번지는 뜨겁고도 슬픈 감정. 효옥도 효옥이지만 그들의 절개와 충심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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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의 의식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함정임 옮김 / 현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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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정치적인 견해나 사상을 잘 모르더라도 그들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결혼이라는 사회적 계약을 벗어나 50여 년 동안 동반자적 삶을 함께 이끌면서 서로의 다름을 일치시켜 공생해 온 두 사람.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하고 지식을 쌓으면서 처음 만난 이후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서로의 곁을 지켰다.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청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보부아르는 결혼도 아이도 거부한 채, 부부로 살기를 원했다. 계약결혼이라는 독특한 틀 안에서 둘의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우연한 사랑도 인정하는 관계, 상호 평등한 위치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해 온 두 사람. [작별의 의식]은 보부아르의 시선에서 사르트르의 마지막 10년을 담은 책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시들어가는 듯한 사르트르의 저물어가는 생의 끝자락을 그리고 있지만,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허물어져 가는 사르트르 뿐만은 아니다. 평생동안 그가 놓지 않았던 '이데올로기적 관심'. 그는 고전적 지식인에 반하는 새로운 지식인-스스로 세운 민중적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며 지식인으로서의 순간을 부정하는 존재-을 설정하고, 대중과 융합하기 위한 길을 모색했다. <엥테르 뤼트: 상호투쟁>의 편집장을 맡았고, S.R.(스쿠르 루주, 붉은 구원대)을 창설했으며, 여러 시위에 참석하고, 청원서에 서명하고, 리베라시옹 신문사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가끔 현기증을 느끼며 혈압이 높아지곤 했던 그의 병세가 위중해지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요실금이 생겼고, 점차 시력이 악화되었으며 틀니를 해 넣어야 했고 당뇨 증세까지 보였던 사르트르는 말년에는 급기야 정신마저 혼미해지기에 이른다.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바로 앞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도 어려워했던 사르트르. 지켜보는 보부아르도 무척 고통스러웠겠지만, 자신이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을지, 글을 쓸 수 있을지, 제대로 생각을 하게 될지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했던 사르트르 본인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5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동반자적 관계가, 이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돌봐야 하는 피보호자와 보호자의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생의 대부분을 공유하고 함께 책을 읽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한 상대를 잃는다는 것.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슬프고 가혹한 일이다.

 

 

중간중간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는 표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보부아르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르트르의 생의 마지막을 전달하려 애쓴다. 사르트르의 죽음에 관한 내용 뿐 아니라 활동한 내용, 함께 여행을 떠났던 내용 등 사르트르의 철학적 견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나라도 몇 가지만 검색하면 비교적 쉽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이 그렇게 비참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그가 무너져가고는 있었지만 냉철한 그의 지성은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부아르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책의 제목인 [작별의 의식]은 1971년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우연히 뱉은 작별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보통 프랑스어에서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은 aurevoir 이지만 제목에 쓰인 adiex는 연인 관계의 끝, 혹은 생사의 갈림길 등 영원히 헤어질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어쩌면 사르트르는 10년도 되지 않아 보부아르와 영원히 이별하게 될 것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의 죽음이 우리를 결합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생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답다.

p283

 

이제 다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보부아르의 마지막 고백을 통해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충만된 것이었는지 전해진다. 그녀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걸로 되었다.

 

** 출판사 <현암사>를 통해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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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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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숨이 멈춰지고, 이승이 아닌 저승으로 가는 것. '저승'이라는 곳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저 세상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이 삶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과는 달리 죽음은 예습할 수 없다. 아무리 죽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묘사한 책이나 영상을 접해도 죽음의 순간이 아니면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갖는 두려움의 원천이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죽음이라는 것은 부정적으로 여겨졌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안하다며 꺼려지는 대상이다. 오죽하면 어지간한 빌딩에서는 3층 다음이 4층이 아니라 5층이거나 숫자 4가 아닌 F로 표기되었겠는가. 죽음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해서도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가족의 영혼이라 해도 유령은 유령인 것이다. 그리하여 초상을 치를 때 입관하기 전에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히고 시신을 일곱 매듭을 지어 묶는 것은 사령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비롯된 행위다. 공포는 대상을 따지지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까지 옮겨진다. 예전에는 아기무덤의 일부는 땅에 묻힌 옹기 뿐으로, 그 속에 아기시신을 구겨서 넣고는 땅에 묻은 뒤 큰 바위로 눌러버렸다고 한다. 아기, 처녀, 총각. 아이들과 미성년의 죽음을 무서워한 어른들. 저자는 그들을 애처롭다 여겼다.

 

죽음에 대한 이런 공포와 두려움의 이유를, 저자는 삶과 죽음을 따로 떨어트려 놓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되도록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풍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인간은 죽음과 화해해야 한다' 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 안에 바로 죽음이 있다. 이런 생각은 비단 저자만의 견해가 아니라 조상들의 풍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남은 예전부터 삶의 방향, 서북은 죽음의 방향이라고 특정지어져 왔다. 그런데 옛신라인은 죽은 이의 머리 방향을 구태여 동남으로 잡아주었는데, 저자는 이를 죽음을 삶의 연장선이라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생과 사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속에서 바라본 죽음에 대한 생각들. 용어들이 다소 낯설어 어렵게 다가온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도 생활 곳곳에 남아있는 풍습들을 읽어가며 과연 죽음이란 무엇이고 사는 내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잘 살고 어떻게 하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웃음을 들이키소서. 죽음 앞에서, 부디 부디.
p 370

 

여든이 넘은 나이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지금의 삶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고 '몇 년간 까불고 살았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이셨다는 저자.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깊게 사색해온 어르신은 과연 죽음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본인이 말씀하신대로 죽음 앞에서 웃음을 들이키면서 한평생 잘 살았다고 편안하셨을까. 여전히 죽음을 생각하면 무섭고 두렵지만, 우리 모두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며' 겸허히, 후회 없이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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