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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숨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평점 :

자고로 남자든 여자든 아름다운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고 들었다. 편견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예전에 본 TV 프로그램에서는 연쇄 살인마 중에는 잘 생기고 스마트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 외모를 무기로 범행대상을 물색하고 유혹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삭막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 아무리 과거에 나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매혹적인 누군가가 나타나 입의 혀 같은 달달한 말을 내뱉는다면 일단 내면의 가드를 올려야 하는 게 아닐까.
무기력하거나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달콤한 한 마디의 말은 희망이 되기도 하고 유혹의 손길이 되기도 한다. 가나코는 후미에에게 무엇을 주고 싶었을까. 정작 후미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다면서 꼭 은혜를 갚고 싶다는 가나코. 육아와 살림으로 과거의 미모는 찾아볼 수 없는 데다 해리성 장애까지 앓고 있는 후미에에게 접근한 가나코는 '너는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있어'라는 말로, 후미에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에 불을 지핀다. 얼굴에 상처가 있어 앞에 나설 수 없는 자신 대신, 프랑스의 유명 화장품의 얼굴 마담이 되어 달라는 가나코의 제안에 넘어간 후미에. 이제 다시는 초라한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다짐하며 새로운 생활에 흠뻑 젖어간다.
아내이자 엄마인 후미에의 시선과 형사 하타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가나코의 유혹에 빠져 화장품 판매를 시작한 후미에의 모습은 어쩐지 불안불안하다. 분명 이것은 사기라고, 가나코에게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물론, 이 행복에 만족하는 후미에에게 어서 빨리 빠져나오라는 조급한 마음을 갖게 된다. 형사 하타가 조사하는 살인사건의 어딘가, 분명 후미에와의 접점이 있다. 살해당한 사람은 누구이며 사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
가늘고 길게 뻗은 잎 끝부분에 항아리 같은 모양의 자루가 달려 있다. 예전에 TV에서 본 식충식물이다. 달콤한 꿀로 벌레를 끌어들여 안으로 떨어진 벌레는 먹으면서 산다. 이름이 떠올랐다.
-네펜테스
p 443
가나코와 후미에의 관계는 상상했던대로였으나, 진상에는 더 깊은 사연이 있었다. 혹자는 가나코를 옹호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녀 나름대로의 생존 방법이었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분명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모든 선택의 순간, 길 위에 거침없이 발을 올려놓을 게 아니라 한 번만 더 숨을 고르고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어떤 모습의 자신이 있을지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자신이 선택한 저울에 타인의 목숨이 달려 있다면 더욱.
생각지 못한 후미에의 사연에 마음이 아파 조금 울었다. 그녀가 해리성 장애를 갖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나코의 달콤한 꿀에 그리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 후미에를 어리석었다고 탓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어떤 순간의 '꿀'을 원하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강력한 한 번의 꿀이 아니라, 일상에서 매일매일 느낄 수 있는 온기와 평온일 것이다.
학교 성적이나 학력 같은 것만 따지다니 한심하지 않냐? 학력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아. 대단한 사람이 안 돼도 상관없어. 그냥 웃으며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p 161
** 출판사 <비채>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