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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평점 :

[여기는 킹덤,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
우린 가족이다. 우리가 믿을 건 가족 뿐이야. 친구, 애인, 이웃, 이 지방 사람들, 국가. 그건 모두 환상이야. 정말로 중요한 때가 오면 양초 한 자루 값어치도 안 된다. 그때는 그들을 상대로 우리가 뭉쳐야해, 로위.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 가족이 뭉쳐야 한다고.
p 13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맛보기 위해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굴려본다. 분명 사랑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 네스뵈가 창조한 [킹덤]에서 가족이란 한 인간을 옥죄는 족쇄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는 가장의 거역할 수 없는 권력. 그것은 마치 산 정상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어쩔 수 없이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것처럼 한 인간의 전부를 강타하고, 그것도 모자라 뼛속까지 파고든다. 거역할 수 없는 주문. '가족'이라는 말로 로위는 영원히 칼에게 묶여버렸다.
칼에게 닥쳤던 불행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자신을 벌하기 위해 로위는 모든 것을 책임진다. 부모님이 탄 캐딜락이 추락한 사건과 프리츠의 밤으로 묘사되는 그 잔인하고도 성스러운 맹세와도 같은 그 날의 일들. 칼은 떠났고 로위는 남아 잊혀지는 듯 했지만 15년 만에 돌아온 칼로 인해 묻혀 있던 비밀은 다시 그 얼굴을 드러내려고 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칼 옆에, 로위를 위협할만한 치명적인 꽃이 함께한다는 것.
르네 지라르의 말이에요. 철학자인데, 우리가 우러러보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자동적으로 원하게 되는 욕망을 그렇게 불렀어요.
p 542
끝내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필요할 때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로위는 마치 살인 기계처럼 느껴진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칼과 관계된 것. 과거의 빚을 청산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것이었던가.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로위는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비밀이 있고, 사람을 죽이고, 결국에는 사랑하는 칼을 생각한다면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 일까지 저지른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요 네스뵈가 그리는 세상 속에서 주인공들은 어찌 그리 하나같이 연민의 한끝을 건드리는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로위지만 차마 그를 미워할 수는 없다. 심지어 그가 벌였던 그 모든 범죄가 밝혀지지 않기를 바라게 되고, 그의 주위를 맴돌며 매의 눈으로 로위를 의심하는 경찰관이 악당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스릴러 중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인 해리 홀레조차도 알콜중독자이고 어둠에 영혼을 사로잡힌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정의의 편에 서 있기는 했다. 로위에게 정의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오직 살아남는 것, 동생을 지켜야 하는 일만이 삶의 목표다. 맹수처럼, 야생 동물처럼 돌진하지만 새와 같은 가련한 심장을 가진 로위.
칼은 그가 가진 '아벨'이라는 미들 네임처럼 로위의 동생으로서 늘 로위의 보살핌을 받는다. 성서 속에서 형 카인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아벨. 하지만 이 작품에서 형제를 죽이고 있는 것은 로위가 아닌 칼이다. 생명이 아니라 그 영혼을. 로위에게 착 달라붙어 그 해사한 미소 하나로 조금씩 로위의 영혼을 좀먹어 간다. 형이라고 부르며, 도와달라고 간청하면서. 아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카인의 영혼을 가진 칼.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가족'이라는 단어다. 로위는 칼을 사랑했을까. 칼은 로위를 사랑했을까. 이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요 네스뵈는 결코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자비롭지 않다. 오히려 극한까지 그들을 내몰고, 어디 견뎌볼 수 있다면 견뎌보라고 채찍질한다. 해리 홀레에게도, 로위에게도. 그래도 해리 홀레는 마지막에 늘 자신이 하는 일에 형사로서 자부심 하나는 건질 수 있었다. 로위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가족'이라는 텅 빈 성 안에 홀로 남아 그는 끝없이 싸워야 한다. 영원한 원 안에서 그가 걷는 걸음은 결코 그를 앞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가족이라는 지옥. 오히려 죽음을 열망하게 되는 그 세상 속에서 그가 안식을 찾는 날이 오기는 할까.
이미 한 권 소장하고 있었음에도 사인본을 위해 한 권 더 구매한 [킹덤]. 요님을 만나 포옹까지 나눈 추억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해리 홀레를 만나지 못하는 올해의 아쉬움을 이번에는 [킹덤]으로 달래본다. 비록 그 끝에서 이야기가 주는 칠흑같은 어둠과 절망에 정신을 못차리더라도.
** 출판사 <비채>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