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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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고가 로버트를 만난 것은 가을학기가 끝나가던 어느 수요일 밤, 그녀가 일하는 예술영화 전용극장의 구내매점에서였다. 첫만남에서 마고가 로버트에게 살짝 끼를 부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팁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고, 팁을 받지 못한다해도 그녀의 눈에 로버트는 귀여워보였다. 로버트는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으나 그 다음 주에 다시 극장을 찾은 것을 보면, 그 역시 마고에게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영화가 끝나고 다시 찾아온 로버트는 마고의 전화번호를 얻어간다. 단순한 문자 메시까지 꿈꾼다. 스무 살인 마고와 서른 넷인 로버트. 사랑을 나누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가 벗은 로버트의 몸과 마주한 순간, 마고의 감정은 급격히 식어버리고, 그와 섹스하기로 한 것은 생애 최악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관계 후 급하게 그의 집을 나선 마고는 계속되는 로버트의 연락에 곤혹스럽기만 하고, 그에게 이별을 통고하기를 망설이는 마고 대신 룸메이트가 '안녕, 당신한테 관심없어. 이제 나한테 문자 메시지 보내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송해버린다. 당황스러우면서도 홀가분함을 느끼는 마고. 얼마 후 친구들과 찾은 술집에서 로버트의 모습을 발견하고, 간신히 그를 피하지만, 그날 밤 로버트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그 중 하나에서 그는 그녀를 창녀라 부르고 있었다.

 

단순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작가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남녀 사이의 오묘한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갖는 설렘, 어느 새 꿈꾸게 되는 미래를 넘어 데이트 도중 여성이 느끼는 불안-내가 이 남자를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인가, 그는 나를 지금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가, 그가 혹시 연쇄살인범이나 성폭행범은 아닐까 -, 벗은 남자의 신체를 보고 꺼져버리는 감정, 어느 새 남자의 집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고의 심리를 보면서 '대체 이 여자 뭐야?'할 수도 있겠다. 심지어 마고는 로버트의 집에 순순히 따라가고 그와 섹스하고싶다는 신호를 보내기까지 했으니까. 그녀의 이별 방식이 친구에 의해 어쩌다보니 저질러진 일이라고는 해도 사실 무척 예의없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잠깐이었다 해도 로버트에게 호감을 느꼈고, 사랑한다고까지 생각했고, 로버트에게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으니 단순히 그의 착각이라 할 수는 없겠다. 이별할 때 잠수타거나, 상대에게 이별의 말이 나오도록 종용하는 사람 정말 싫어하는데, 친구의 방식에 편승해 그런 방법으로 이별을 택한 마고는 비겁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렇게 순식간에 마음이 변해버린 마고를 이해할 수 있냐고 물으면, 이해는 할 수 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이해는 된다. 나도 갸우뚱.

 

‘캣퍼슨(cat person)’은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로버트는 자신이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 ‘캣퍼슨’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의 집에 갔을 때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마고는 문득 그가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실, 고양이는 다른 방에 있었을 뿐이고 로버트는 정말로 캣퍼슨이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마고의 불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이 불안은 ‘아는 사람만 아는’ 종류의 것이다. 어쩌면 이 불안이 로버트를 향한 마고의 감정이 사그라드는 데 일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상징과 심리묘사로 가득찬 이 이야기. 쉽지 않았다.

 

[캣퍼슨]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 대부분이 가볍지 않다. 읽다가 머리가 멍-해지는 작품들이 많다. <캣퍼슨>의 거울상과도 같은, 남자의 시점으로 쓰인 소설도 있고(<좋은 남자>), 동화처럼 시작해 순식간에 장르를 비틀어버리기도 하며(<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성 반전 시킨 듯한 작품(<겁먹다>), 직장 내 성추행 문제와 맞물려 통쾌한 재미를 선사하는 소설도 있다(<무는 여자>).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에서는 기괴함과 오싹함을 느낄 수 있고, <정어리>에서는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환상인지 의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장르의 소설은 아니기에 어째서 이 작품들이 이리 인기가 많았는지 초반에는 의문이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아리송.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이 내가 좋다고 남들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한다고 남들도 싫어하는 세계가 아니지 않은가. 곱씹을수록 왠지 선 하나만 넘으면 작가의 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 한 권의 작품집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만큼, 작가가 선보일 장편소설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 뒤로 미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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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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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섯 소녀가 납치된다! 아직 십대지만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는 여자아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누구라도 비명을 지르며 패닉에 빠질 법한 상황이지만 이 소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정확히 초를 세며 가늠하고, 납치되어 감금된 33일동안 치밀하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소녀를 보러 오는 사람은 간수와 의사와 '물으나마나' 부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요리를 하러 누군가가 찾아오지만 그들이 소녀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바로 소녀의 몸안에서 태어날 날을 기다리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아기. 의사는 소녀의 몸상태를 측정하고 분만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물으나마나' 부부는 태어난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모자라보이는 간수 외에도 그와 똑닮았으나 사이코같은 쌍둥이 브레드도 한 팀이다.

 

이쯤되면 과연 이 소녀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짐작한대로 보통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자신의 감정을 켰다 껐다하며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범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여 그의 심리를 파악하고는, 단번에 상황을 제압헀다. 그런 소녀였기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복수할 도구들을 물색하며 면밀히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소녀가 아니라 납치범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의 날이 밝았다!

 

피해자의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주도면밀한 계획과 그 실행으로 작품이 꽉꽉 채워져 있다. 제목인 [복수해 기억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납치된 소녀가 복수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과정, 복수의 실행이다. 자신의 감정을 손쉽게 컨트롤하는 주인공이라 담담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누구라도 까무러칠 상황이지 않은가. 더구나 간수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녀가 어떻게 될 지, 이미 살해당한 다른 소녀를 보여주며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기민한 관찰력과 영특함, 감정조절 능력이 아니었다면 아마 소녀도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새우다 다른 소녀들처럼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독자들은 과연 그녀가 납치범들에게 어떻게 복수할 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어마무시 잔혹한 복수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정된 상황에서의 복수였기 때문인지 간수에 대한 복수가 전해주는 카타르시스가 기대보다 약하게 느껴졌다. 분명 뒤에 뭐가 더 있지 않을까-라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마구 넘겼지만 의사에게도, '물으나마나' 부부에게도 가해지는 복수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아주 정의(?)롭게 행해지는 탓에 다소 김이 새는 느낌이랄까. 소녀는 브레드에게조차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데 어쩌면 그 편이 브레드 개인에게는 더 잔혹한 형벌일 수 있겠지만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답답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내가 그 동안 너무 피철철 스릴러에 노출된 탓인가!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소녀가 계획을 세우는 과정 하나하나의 치밀함은 눈여겨볼만 하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섀넌 커크. 일단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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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뉴욕
이디스 워튼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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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순수의 시대]로 유명한 작가,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한 이디스 워튼의 단편집인 [올드 뉴욕]이 출간되었다. 국내에는 처음 선보이는 단편집 네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작가가 주로 뉴욕 상류사회의 모습을 그려왔던 그 동안의 작풍이 뚜렷하게 담겨있는 작품들이라고 할까. 사실 [순수의 시대]도 처음 몇 장 읽다가 포기했을 정도로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잡아끈 것은 바로 제목이었다. 뉴욕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올드 뉴욕이라니, 과연 어떤 모습들이 담겨있을까 궁금했다.

[올드 뉴욕]에는 <헛된 기대>, <노처녀>, <불꽃>, <새해 첫 날>이라는 작품들이 담겨 있는데 이 중 가장 인상깊게 읽은 작품은 <노처녀>였다. 랄스턴 가문의 델리아는 얼마 남지 않은 샬롯의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 자신은 두 아이의 엄마에 남편으로부터 후한 용돈을 받으며 삶의 기반을 잡아가는 '멋진 여인'이다. 하지만 샬롯이 찾아와 자신은 결혼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샬롯은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아동보호소에서 많은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이도 이곳에서 몰래 키우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델리아는 남편을 통해 샬롯과 아이가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남편이 말에서 떨어져 사망한 후에는 샬롯과 그녀의 딸인 티나를 집으로 들여 함께 살아가기에 이른다. 티나에게 출생 이야기를 하지 않은 샬롯으로 인해 티나는 샬롯보다 델리아를 더 엄마처럼 여기며 사랑하고 따른다. 이윽고 티나가 결혼할 시기가 되자 델리아는 티나는를 입양하고, 샬롯은 처음에는 이를 반대하지만 결국 티나의 행복을 위해 델리아의 뜻을 따른다.

원래 델리아를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거절당한 뒤 샬롯과 관계를 가진 클레멘트. 그가 바로 티나의 아버지였다. 샬롯은 아이와 자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델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이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해주고 싶었기에 엄마 자리를 포기했다. 하지만 원래는 언니를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낳고, 이제는 그 아이가 친모인 자신은 이모라 생각하며 델리아를 엄마라 부르고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샬롯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여성 두 명과 그 사이에 놓인 아이의 심리가 깊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내가 마치 샬롯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델리아보다는 샬롯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었는데 아마도 내가 두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때문에 델리아보다는 샬롯의 마음의 고통이 더 처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이디스 워튼. 그녀이기 때문에 상류층에 대한 묘사와 비판 섞인 위트있는 글쓰기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짧지만 강렬한 네 편의 이야기를 읽고나니 그녀가 한층 심도있게 그려냈을 [순수의 시대]가 다시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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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고양이
모자쿠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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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곰돌군들을 낳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잔소리를 듣는다. 누구에게? 친정엄마에게! 결혼하기 전에도 이리 엄마의 잔소리가 심했던가 가만히 생각해보지만, 지금처럼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저질체력이라 아이 둘 돌보는 것을 힘겨워하는 나를 위해 엄마가 집에 자주 오시는 편인데 오실 때마다 잔소리가, 이건 뭐, 와! 처음에는 '나도 이제 결혼도 했고, 아이 둘 엄마인데 잔소리 좀 그만해!' 하며 투닥투닥 다투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그냥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린다. 혹은 '또 시작이네' 하며 그냥 웃지요. 하하! 그런데 이런 잔소리를 엄마가 아닌, 사람이 아닌 고양이가 해준다면 어떤 느낌일까. 짜증이나 화가 나지 않고 너무 귀여워서 계속 듣고 있고 싶을 것만 같은 기분!

 

2018년 1월, 트위터에 '잔소리 고양이'라는 계정을 개설, '집사'에게 애정 가득한 잔소리를 쏟아내는 고양이가 주인공인 작품이 업로드 되기 시작한다. 작가는 모자쿠키, 필명에 별 의미는 없단다. 이 계정은 한 달 만에 10만 팔로어를 모았고, 게시글마다 수천 건의 리트윗과 수만 건의 '좋아요'를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관심과 인기를 얻으며 단숨에 25만 팔로어를 달성한다. 하필 '잔소리' 고양이라니, 사람들은 어떤 점에서 이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걸까.

읽다보면 음성이 지원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혹시 또 간식?! 이번에는 꼭 살 뺀다고 하지 않았어?! 적당히 좀 먹지? 간식은 금물이야! 살을 빼고 싶으면 조금은 참아보라구! 또 스마트폰 보네! 어차피 게임하지!! 어?뭐? 총알이 남아? 머시기 타임? 이벤트 시작? 뭐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스마트폰 게임만 하지 말고 눈앞의 일도 잘 봐야지!! 비싼 다이어리 사고는 벌써 안 쓰는 거야? 책 읽는 습관을 들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의지를 불태우더니 근육 운동은 어떻게 된 거야! 해보겠다고 말한 것 중에 하나 정도는 끝을 봐야 하지 않아? 등등의 잔소리! 으악!

귀여운 고양이의 끝없는 잔소리가 이어지는데, 이게 또 사람에게 듣는 것과는 다른 묘한 매력이 있다. 1인 가구의 비율이 늘어간다는 요즘.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잔소리가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부모님에게 들을 때는 '아이 귀찮아! 또 잔소리야!' 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누군가에게 걱정 어린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다는 희망. 그런 마음들이 모여 이 만화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애정 가득한 잔소리가 그리우신 분! 여기 모이세요! 잔소리 고양이가 잔소리 폭격을 날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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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우일 그림,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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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는 이제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이벤트를 마련하거나,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제 조금 자란 첫째 곰돌군이 가슴 설레어하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두고 갔는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트리 밑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에 정겨움과 행복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결혼하고 내가 나 자신을 조금씩 뒤로 밀리게 만들면서 그 어떤 감흥도 갖지 못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가,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면서 다시 강력한 이벤트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 두근두근한 마음에 한층 불을 지피는 책이 있으니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의 작가 이우일님의 컬래버레이션으로 태어난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작곡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양 사나이. 성(聖) 양 어르신님을 추모하는 음악을 작곡해 크리스마스에 공연하는 양 사나이 협회의 주문이 있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 수락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지 않은 지금도 여전히 곡은 쓰지 못한 상태. 양 박사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난데없이 양 사나이가 저주에 걸린 탓에 피아노도 못치고 작곡도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유는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구멍 뚫린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라는데! 크리스마스 이브는 성탄절 전날이기도 하지만 성 양 어르신이 한밤중에 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떨어져 돌아가신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그날은 구멍 뚫린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게 예전부터 쭈욱 내려오는 금기사항이란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성 양 어르신이 떨어져 돌아가신 구덩이, 직경 2미터에 깊이 203미터인 구덩이에 떨어져야 하지만 2미터 3센티미터인 구덩이에 떨어져도 무방하다며 양 사나이에게 조언해주는 양박사. 결국 구덩이에 떨어지기 위해 구멍을 파는 양 사나이.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에, 성 양 어르신이 구덩이에 떨어져 돌아가신 시각인 새벽 1시 16분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구덩이에 떨어진다! 그 구덩이 안에서 만나는 두 꼬불탱이와 208과 209 쌍둥이, 바다까마귀 부인에 부끄럼쟁이. 그리고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

 

처음에는 당연히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따뜻한 이야기일 거라고 믿으며 책을 펼쳤는데, 무서웠다! 내용이 아니라 그림이! 양 그림이 무척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색감도 뭔가 기괴한 것이 '이것은 크리스마스를 노리는 호러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구덩이에 떨어져 만나는 존재들의 이미지가, 뭐랄까, 적나라하다고 해야 하나,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크리스마스와는 영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반전 아닌 반전. 가슴이 따뜻해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에 상상해 볼 수 있음직한 이벤트! 과연 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발한 상상력을 따라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물론 소설도 좋아하지만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작가 특유의 위트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카트 멘시크 그림과 함께 한 [버스데이 걸]은 조금 난해해서 작가의 이런 성향과 나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걸쭉한 그림들에 겁을 조금 먹었을 뿐 이야기 자체는 좋았다. 혹시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인가! 이우일님이 쓰신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과 얼마 전 아내 분이신 선현경님의 [하와이하다] 도 좋았는데, 나는 앞으로도 이우일님의 그림보다는 에세이를 더 자주 찾아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이우일님의 색다른 이벤트. 아직까지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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