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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미술관 - 그림으로 읽는 의학과 인문학
박광혁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10월
평점 :
<미술관에 간 지식인> 시리즈의 저자 박광혁이 새롭게 출간한 [히포크라테스 미술관]. 그림 속에서 의학과 인문학 관련 지식을 중점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해 신간이 나오면 눈여겨보곤 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시각으로 그림을 보게 해주는 책이 출간된다는 것은, 독자로서 매우 기쁜 일이다.
책의 제목에 걸맞게 여러 질병, 진화생물학적 관점, 삶과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 처음을 열어주는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영원의 문>. 머리가 벗겨진 백발의 노인이 벽난로 앞에 앉아 비탄에 빠진 나머지 얼굴을 감싸쥐고 있는 그림.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소리 없는 절규가 그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만 같다. 반 고흐의 삶과 그 죽음이 어떠했는지는 알고 있는 사람이 많겠지만 음악가 차이코프스키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랐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작곡한 <비창>. 콜레라로 사망하기 아흐레 전에 발표한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 자신을 위한 레퀴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음악과 그의 죽음에는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엄머! 그림의 소재로 '이'가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맞다. 사람의 머리에 기생해 살면서 피와 체액을 빨아먹고 사는 바로 그 이!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활동했던 화가 피테르 데 호흐의 작품에는 <어머니의 의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이 그림에는 엄마가 아이의 머리에 이가 있는지 손으로 뒤적거리고 있다는 유니크한 해석이 있다고 한다. 그 시절 네덜란드에서는 아이의 머릿니를 잡는 것이 모유수유, 자녀 예절 교육 등과 함께 가정주부의 중요한 책무였단다. 특히 아이의 머리를 청결하게 관리하는 것은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책에 언급할 정도로 매우 강조되는 덕목이었는데,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왕립 미술관에 전시된 <딸의 머리를 빗겨주는 어머니>도 '이'를 소재로 한 그림 중에서는 유명한 듯 하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옆에 자리잡고 있다는데, 아마 저자처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뇌 부상으로 인한 감정변화를 일컫는 '아폴리네르 증후군'의 주인공이 된 시인도 있다. <모나리자>의 절도범으로 몰렸던 기욤 아폴리네르가 그 인물로, 프랑스의 권력층을 비판하던 이탈리아인인 기욤을 프랑스 경찰이 유력 용의자로 지목한 것이다. 후에 진범이 밝혀졌지만 그는 이 일로 연인 마리 로랑생과 헤어지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한 기욤은 최전선으로 이동하던 도중 어디선가 날아온 파편에 머리를 맞아 크게 다치고 파리의 큰 병원에서 개두술까지 받지만, 수술 후 후유증을 얻게 된다. 이 후유증으로 약혼자 마들렌 파제스와도 파혼하게 되는데, 기욤이 오른쪽 측두엽의 손상으로 성격이 크게 변했다는 것이다. 시인으로서 감정과 정서가 메말라버린, 최악의 사형선고. 결국 그는 전쟁 중 얻은 폐 손상에 스페인독감이 더해져 목숨을 잃고 만다.
이외에도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인 엘리자베스 폰 비텔바흐, 통칭 씨시황후의 비극적인 삶과, 현대의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은 작가 세르반테스의 작품 [돈키호테] 속 돈키호테에게 조현병을 진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가 앓은 질환이 루이소제 치매로 보인다는 것, 심지어 렘수면 행동장애까지 보인다는 흥미로운 기술이 이어진다. '형제의 난'의 기원이 된 카인과 아벨 이야기, 지적이고 우아했지만 시대의 창녀로 평가절하된 퐁파두르 부인, 줄리언 반스의 작품 소재가 된 '닥터 러브', 드레퓌스 재판과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에밀 졸라 등의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차 있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원래 그냥 '선서'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학살에 참여한 일부 의사들의 죄과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1948년 세계의사협회에서 수정해 만든 제네바 선언이 오늘날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드라마 등에서 등장인물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할 때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정신이 이렇게 지켜지면서 전해진다는 것에 무한감동을 받았었는데,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림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읽는 시간은 항상 즐겁다. 그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은 결코 허구가 아니며 인간이 걸어온 또다른 발자취다.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라는 질문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해답에 대한 가이드로 가득한 그림책. 흥미롭게 잘 읽었다.
** <어바웃어북>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