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추억 - 한가람 대본집
한가람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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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해의 마지막 밤을 보냈지만 2017년의 마지막 날 밤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곰돌군이 일찍 잠들어주어서 저와 짝꿍은 치킨을 시켜 같이 먹고 있었어요. 떠들썩하게 새해를 맞지는 못하더라도 조촐하게나마 육아 두 번째 해를 무사히 넘긴 것을 자축하고, 올해 태어날 둘째를 생각하며 힘내보자고 격려하던 중이었습니다. 연기대상도, 가요제도 시들해서 뭔가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나 TV화면을 요리조리 돌리던 중, 배우 최강희님이 열심히 뛰고 있는 장면을 발견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보게 된 이 드라마가 이토록 오래 마음에 남게 될 줄은, 그 때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한여름의 추억]은 이 드라마의 대본집이에요.

 

한여름은 37세의 12년차 라디오 작가입니다. 예전에는 찬란하게 빛나고 예뻤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는 자신을 보통여자라고 생각하는 그녀.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고 떠나보냈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네요. 그녀가 일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로 한여름의 옛 연인이자 팝 칼럼니스트인 박해준을 섭외하려 하고 그녀는 가장 사랑했던 남자지만 가장 아픈 상처를 줄 수밖에 없어 잊지 못한 그를 다시 한 번 떠올리죠. 박해준을 방송국에서 만나기 전, 언니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잠시 휴가를 떠난 그녀. 햇빛 찬란하고 여유로운 날, 의문의 총격을 당합니다. 그녀의 죽음을 뉴스와 라디오로 전해들은 과거 그녀의 옛 연인들. 제각기 가지고 있던 한여름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집니다.


저는요...외로워요. 외로워서 누가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줘도 울컥하고 밥 먹었냐는 그 흔한 안부 인사에도 따뜻해져요. 스치기만 해도 움찔하고, 마주 보기만 해도 뜨끔하고, 그러다 떠나버리면...말도 못하게 시려요.

결혼을 하고 곰돌군을 낳아 키우면서 제가 가진 감성은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어요. 저의 모든 에너지가 곰돌군에게 집중되어서 뭔가에 감동받거나 마음 아파하는 일이 적어졌거든요. 아기를 낳은 모든 사람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무감각해진 면이 생겨서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보다, 이렇게 애엄마가 되어가나보다하는 생각에 살짝 울적해진 것도 사실이었어요.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나서는 한동안 마음이 시리고 머릿속이 대사들로 가득해졌습니다. 그래서 대본집이 나왔을 때, 드라마의 대사를 눈으로 보고 간직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한여름의 추억]에 이렇게 가슴 시린 것은 이 작품이 사랑과 연애에 관련된 것 뿐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장례식이?

. 외국에서는 장례식이 유쾌하대. 그 사람 좋은 곳으로 가라고 보내주는 의미가 있어서 다들 웃고 즐긴대...내 장례식도 그랬으면 좋겠어. (활짝 웃으며, 손 팔랑팔랑 흔들며) 안녕! 잘 가세요!! 가서 행복하세요!! 한여름 양!!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기억하고 슬퍼해줄지, 나 자신은 알 수 없는 일이죠. 갑작스러웠던만큼 충격적인 그녀의 죽음 앞에서 누군가는 과거를 극복하고, 누군가는 곁의 연인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마주합니다. 죽음은 그렇게 삶과 맞닿아 있어 더욱, 오묘한 것이 아닐까요. 그 오묘함 안에 옛 인연들, 특히 옛 연인들이 자신의 장례식에 와주면 좋겠다는 한여름은, 얼마나 자신의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고 외로웠던 것인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방송된 2부작과 별도로 제작사로부터 제안 받은 4부작의 대본집이, 감성적인 영상과 함께 실려 있습니다. 비록 드라마와 대본집 속 한여름은 손을 흔들며 떠나버렸지만, 세상의 많은 한여름들의 인생은 쨍한 햇살만큼 다시 밝아질 거라고, 그녀 자신은 비록 보통여자라고 믿고 있지만 아니라고, 시간의 흐름이 쌓여 그녀를 다른 형태로 빛나게 해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한때는 이 생활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조금은 울적했었던 저를 비롯해서요.

 

지금도 배우 최강희님의 목소리가, 손을 흔들며 경쾌하게 떠나가던 뒷모습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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