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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애정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이언 매큐언의 영향으로 처음 맨부커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맨부커상 후보작이라거나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작품에는 신뢰를 가지고 있어요. 읽어본 책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지만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도 좋았고, 접해본 맨부커상 수상작들이 대부분 제 취향이라 이번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도 무척 기대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도 흥미로웠지만, 한국이나 중국, 일본이 아닌 서양작가가 본 일본군의 모습도 궁금했고, 12년간 집필에 매달려 완성한 5개 판본 중 나온 최종판이라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었어요. 어떤 대단한 작품인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누구나 궁금해할만한 작품일 겁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살아남은 외과의 도리고. 지휘관으로서 포로수용소에서 일했던 그는 현재 잘나가는 의사이자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리는 바람둥이이기도 합니다. 일견 그의 겉모습은 현재를 즐기는 향락적인 인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가 겪었던 과거는 그의 마음 속 한구석에 자리잡아 언제나 도리고를 놓아주지 않죠. 화려한 겉모습과는 별개로 그의 내면은 황량하게만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 있는 건 도리고가 평생의 사랑이라 생각한 에이미. 전쟁을 배경으로 한만큼 전쟁포로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과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당한 우리 백성의 모습도 가슴 아프게 그려져 있어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생각보다 숨가쁜 전투 장면이나 매우 잔인한 모습의 묘사는 적은 편입니다. 무척 서정적인 작품이에요. 이런 식으로도 그 세계를 그려낼 수 있구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력에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각 챕터의 제목이 일본의 유명한 하이쿠 작가들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쓰오 바쇼, 고바야시 잇사 등 그들의 하이쿠를 보면서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가 과연 무엇인가를 더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양 작가의 책임에도 어쩐지 일본 작가의 책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요.
작품이 끝난 지금 뭔가 가슴이 먹먹하고 한편으로는 막막한 기분에도 휩싸입니다. 괜히 책등도 쓸어보고 책장을 다시 넘겨보게도 되네요. 한 번 읽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역시 맨부커상 수상작답게 두고두고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