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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평점 :
하이쿠는 세상에서 가장 짧다고 일컬어지는 5·7·5‘의 열 일곱자로 된 한 줄의 정형시이다. 하이쿠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면서였는데 사실 그 때도 하이쿠의 매력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었다. 나에게 하이쿠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시험을 위해 누가 무엇을 지었는지 알아두어야 하는 시였기 때문이다. 사실 5·7·5의 짧은 시를 읽고 무엇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시인이 본 것을 내가 똑같이 보고 있지 않으며, 그가 느낀 감정을 내가 오롯이 느낄 수 없으므로. 그럼에도 내게 하이쿠는 우리나라의 시와는 다른 차원의 처연함, 애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마도 그것은 내가 아직까지 외우고 있는 한 줄의 와카와 닿아있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おもいつつ寝ればやひとのみえつらむ夢と知りせばさめざらましを
생각하면서 잠들었더니 꿈에서 그를 보았다, 꿈인 줄 알았다면 깨지말 것을 그랬다는 연정의 마음을 노래하는 이 시는 와카 중에서도 유명하기로 꼽힌다. 이 노래에서 느껴지는 애잔한 분위기가, 어쩐지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공식처럼 일본의 시에 모두 대입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시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쯔오 바쇼, 고바야시 잇사, 요사 부손 등으로 대표되는 하이쿠는 언어의 기교를 중시한다기보다 삶의 진정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앞의 와카처럼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데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하이쿠뿐만 아니라 류시화 시인의 해설이 들어가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을 눈여겨볼 수 있게 해준다.
하이쿠가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치는 것은 ‘진실성’ 때문이다. 하이쿠 자체가, 언어적 기교가 시의 수준을 좌우한다고 믿었던 시대에 반기를 들 듯 진실한 경험에 얼마나 가 닿았는가를 좋은 시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衣替えて座って見てもひとりかな
옷 갈아입고 자리에 앉아 봐도 혼자여라
류시화 시인의 해설에 따르면 ‘혼자’는 비관도 동정도 아닌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단어일 뿐이다. 꾸밈없이 자기연민도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치장과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성이고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있는 그대로를 중시하기 때문에 시적인 맛, 읽는 맛이 떨어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바쇼의 제자인 기카쿠의 작품을 바쇼가 고쳐 쓴 것이 있다.
赤とんぼ羽根を取ったら唐辛子
고추잠자리 날개를 뽑으면 고추
唐辛子羽をつけたら赤とんぼ
고추에 날개를 붙이면 고추잠자리
하이쿠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고쳐썼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이 외에도 계어(계절어)를 사용하거나 단어의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시들을 읽어보면 이것이 바로 언어유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바쇼와 잇사, 부손 등 이미 알고 있던 작가들의 작품을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된 것도 좋았지만 그 외 기카쿠나 란세쓰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새로이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작가들의 사연, 배경 등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그들의 작품을 한층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꽤 두껍기도 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작품을 꼼꼼이 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다. 그러나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어딘가 다른 세상에 있다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작가들이 있던 방 안에, 대청마루에, 여름이 아닌 가을에. 어느 계절에 읽어도 좋을 멋진 작품들이 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