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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심판 1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상상해보자. 정말 끔찍해서 상상하기 싫겠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자. 나의 분신이던 쌍둥이 동생은 6년 전 갑자기 사라졌다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가 아끼던 빨간색 롤러스케이트를 꼭 한 짝만 신은 채로. 그런데 지금 바로 내 눈 앞에 동생의 빨간색 롤러스케이트의 다른 한 짝이 보인다. 그리고 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쓰러져있는 한 남자. 그 남자의 가슴에는 '날 죽여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그는 내 동생의 생명을 앗아간 진범임이 확실해보인다. 그는 의식이 없고, 나와 함께 온 동료는 나에게 원하는대로 하라고 이야기해준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속삭이는 자]가 출간된 후 한동안 뜸하던 작가 도나토 카리시가 '악'에 관한, 또다른 '괴물' 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간의 흐름만큼 [속삭이는 자]때보다 이야기의 구성도 더 탄탄해졌고, 전하려는 메시지도 확실해진 듯 하다. 바티칸에 축적된 방대한 범죄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신부들. 그리고 나이에 맞춰 적당한 사람을 살해하고 완벽히 그 자리를 차치하는 카멜레온 살인범. 작가는 실화를 모티브로 두 방향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짜맞추어 하나의 줄기로 만들어냈다.
총격으로 인해 기억을 잃고 사라진 여대생을 조사하는 신부 마르쿠스. 그는 바티칸에 축적된 기록을 바탕으로 괴물을 쫓는 프로파일러이다. 사라진 여대생 라라의 행적을 좇는 와중에 미제사건의 진범과 피해자 가족이 마주하는 일이 연달아 발생하고, 그 순간마다 피해자 가족들은 저마다의 선택을 하게 된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사랑하는 남편 다비드를 잃은 산드라가 등장한다. 르포기자였던 그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어 그의 짐조차 찾아올 수 없었던 산드라는, 인터폴 형사라는 한 남자의 전화를 통해 남편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살해임을 의심하게 된다. 그가 남긴 여러 장의 사진들. 그리고 하나씩 밝혀지는 다비드의 비밀. 산드라와 마르쿠스의 접점이 밝혀지는 순간, 그리고 마르쿠스가 자신의 기억에서 해방되는 순간, 악이 아니었음에도 악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남자와 악이었음에도 악이 아닌 채 살아온 남자의 존재가 드러난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한 단어는 바로 '선택'이다.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 나의 가족을 해한 그 누군가가 바로 내 눈 앞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선택, 나에게 악으로 갈 수 있는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있을 때 어느 쪽 길을 걸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선택으로 이루어지며 그 작은 선택들이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악에 있어서만큼은 창조되는 것인지, 선택하는 것인지에 대해 정확한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중간중간 추격자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작품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 단락들이 작품의 결말과 어우러져 멋진 엔딩을 만들어냈다. 속편을 예고하는 듯한, 다시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무언의 경고.
바티칸이 가진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는 말을 듣고 또 성서와 관련된 이야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소재만 가져왔을 뿐.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만큼 카라바조의 그림을 해석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세상에는 정말 그런 신부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바티칸에는 우리가 모르는 비밀들이 얼마나 많을지 궁금하다. 투명인간이 된다면 뭘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바티칸 문서고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대답할 지경이다. 하지만 어쩌면 모른 채 놔두는 편이 더 좋은 것들이 많을 듯 하다는 생각도 든다. 현실이 소설보다 특히 더 가혹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