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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리스트 - 연재물을 쓰는 작가
데이비드 고든 지음, 하현길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스릴러처럼 느껴지지 않는 스릴러입니다. 보통의 영미 스릴러들에서 느낄 수 있는 긴박감이나 스릴은 조금 부족했지만 꽤 색다른 형식의 이 작품을, 전 재미있게 읽었어요. 주인공부터 독특해요. 그의 이름은 해리 블로흐. 여러 개의 필명을 내세워 포르노 칼럼을 쓰기도 하고 SF가 가미된 모험 소설을 쓰기도 하며,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을 내세워 뱀파이어 판타지 소설을 출간하기도 해서 근근이 먹고 사는, 굳이 따지자면 삼류에 속하는 작가입니다. 들어가면 길을 찾을 수 없을 듯한 무성한 눈썹과 털이 난 귀를 가지고 있는 아저씨 외모에 몇 년을 같이 동거하던 여자친구에게도 차인 신세에요. 그나마 곁을 지켜주는 고등학생 동료 클레어가 없었다면 더 불쌍했을, 늘씬한 근육질 몸매에 마초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던 다른 경찰들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희대의 연쇄살인마 대리언 클레이가 편지를 보내옵니다. 세간에 '포토 킬러'로 불리던 그는 네 명의 여자를 살해, 토막낸 후 현재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죠. 그런 대리언이 해리에게 자신의 자서전을 대가로 터무니없는 거래를 제안합니다. 자신에게 편지와 누드 사진을 보내는 열성적인 여성 팬들을 만나 인터뷰한 후 그녀들을 주인공으로 한 자신만을 위한 포르노물을 연재해달라는 것. 처음에는 망설이던 해리였지만 희생자들의 유가족 중 하나인 다니엘라의 -진실을 알고 싶다, 언니의 머리를 꼭 찾고 싶다-는 요청과 작가로서 큰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욕망 앞에서 결국 대리언의 여성 팬들과 인터뷰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사건들. 정신없이 쏟아지는 목숨에 대한 위협,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 진실찾기 앞에서 해리는 과연 작가로서의 심미안을 발휘할 수 있게 될까요.
심각한 분위기보다 코믹한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소설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어요. 대리언이 감추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새롭게 벌어진 사건의 범인은 누구인지, 과연 대리언은 정당한 판결에 의해 사형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인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스릴러라고 해서 매번 숨막힐 듯한 스릴이나 긴박감만을 내세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예전에는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신선한 분위기에 더 마음이 끌렸던 것 같습니다. 포르노라거나 섹스, 잔혹한 살인 등 선정적이고 잔인한 면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의 인상이 찌푸려지지 않게 그런 요소들을 잘 버무린 듯 해요. 읽는 내내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해리가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었고, 그런 상황 안에서 해리가 영웅처럼 느껴지지 않고 절망하거나 슬퍼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들이 굉장히 인간적으로 다가왔거든요.
어쩌면 스릴러적 요소가 가미된 순수문학으로 봐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작품 안에서 작가인 해리 블로흐를 내세워 진짜 작가인 데이비드 고든이 들려주는 이야기, 문장들, 풍자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요즘 여름이라는 핑계로 몇 편의 스릴러를 읽은 터라 대부분 동일한 전개 방식에 살짝 싫증이 나던 차였는데요, 뭔가 익숙한 느낌의 -제가 알고 있던 TV 시리즈의 제목이라거나- 앞에 앉아서 이야기해주는 듯한 문체까지도 마음에 드는 스릴러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으로 올해 6월에는 영화로도 개봉이 됐네요. 일본 영화보다는 헐리우드 영화가 더 그 맛을 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나와주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