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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한 번 읽은 후 되돌아가 다시 정독하고, 나름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한 부분을 간추려 읽은 것까지 반올림해서 합하면 세 번 정도 읽었다 하겠다. 한 작품을 읽은 후 시간의 차이를 두지 않고 마치 끝이 처음과 이어져 있는 것처럼 다시 읽어나간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라는 문구에도 반신반의했더랬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반전이길래.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웬만한 반전에는 이제 끄떡없다 자신하는 나였지만, 이 작품의 반전에는 꽤 놀랐음을 고백한다. 그 반전이라는 것이, 단순히 소설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 인생 그 어떤 시점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을까. 안분지족-의 삶이, 비록 평범할지라도 무척 어려운 것임을 알고 있기에, 때문에 나에게는 그런 삶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것도, 어쩌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선에서 언제 어디서 놀라운 사실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정처없는 두려움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린 시절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종종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을 기억하는 친구를 만나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너 어렸을 때 그랬었어'라는 말을 꺼내면, 마치 미지의 생물과 조우한 느낌이 든다. 마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만이 '나'일 뿐, 과거에 존재했던 '나'는 내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기분 나쁜 일이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은 머릿속에 꽁꽁 묻어두고 몇 달만 지나도 안개 속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의 뇌의 영향인 걸까. 때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도 실제로 일어났던 것처럼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작품은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들이밀지 않는다. 다만 서술할 뿐이다. 때문에 '확실하게' 밝혀졌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우리는 앞뒤 사건들을 짜맞추고 기록을 살펴서 추측할 뿐이며, 그 추측이 사실에 가까울지라도 작가는 그것이 '정확하다'고 판단해주지 않는다. 작품이 삶과 닮아있는 것이다. 기억은 온전한 한 개인만의 것. 나의 기억이 정확한지 어떤지 타인은 물론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다. 내가 했던 말 한마디, 그 때 했던 행동이 과연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었는가도. 이 작품의 매력은 그것에 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편의에 맞추어 기억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는 것. 의식의 표면에서는 비록 인식하지 못해도 무의식적으로는 그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 그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이야기를 통해 전면에 내세우면서 '진심으로' 깨닫게 해준다.
오묘한 작품, 냉철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관찰이 꽤 오랜시간 농축되어 이제야 빛을 발했다는 느낌이랄까. 부커상 수상작들을 유독 애정하는 나이기도 하지만, 이번 작품은 굉장히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아니, 다른 '읽어야 할' 책들 사이에 이미 '읽은' 이 책이 끼워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어쩌면 가까운 시간 안에 나는 또 이 책을 펼쳐들지도 모르겠다. 문장 하나 하나를 곱씹으면서. 독서란 그래서 즐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