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상페
장 자크 상뻬 지음, 허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굉장히 사랑스럽고 포근한 책입니다. 열정적이고 톡톡 튀는 책이기도 해요. [꼬마 니콜라]에 푹 빠져들어 출간되는 책마다 구입해서 책장 한 켠에 가지런히 꽂아두곤 했는데, 처음에는 이 [뉴욕의 상뻬]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제목이 [뉴욕의 상뻬]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기대와 다른 책이어서 실망했다기보다 오히려 더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 밖에 바람은 다소 불지만 햇빛은 비춰지고, 부모님 두 분은 나란히 낮잠을 즐기시는 이 오후에,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실로 오랜만에 -아, 봄이 오는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제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있다는 증거같아 약간 안심이 됩니다. 길고 긴 겨울을 지나오면서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야 보다 나은 생활이 지속될 거라는 걸, 실행은 못했지만 깨닫고 있었으니까요. 스트레스와 마음 고생으로 3월을 심하게 앓아야 했던 저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책입니다, 이 작품집은요.  

 

이 책은 1978년부터 2009년까지 잡지 <뉴요커>에 장 자끄 상뻬가 그린 표지화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분량이긴 하지만 상뻬와 르카르팡티에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서, 상뻬가 처음 <뉴요커>에 표지 의뢰를 받았을 때의 심경, 그가 잡지 사장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경외, 뉴욕 사람들에 대해 품은 생각, 뉴욕 그 자체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 다른 삽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것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잘 몰랐지만 이 <뉴요커>라는 잡지에 표지화가 실린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인 모양으로, 프랑스인 특유의 밝고 흥분된 상뻬의 목소리가 종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답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뉴요커>가 자신들의 기준을 강요하지 않고 '상뻬다운' 그림을 요청했으니 그럴 수밖에요. 자신의 부족함을 늘 인정하는 겸손함도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그만의 확고한 생각도 가지고 있는 상뻬가, 어떤 그림이 나오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할 때의 목소리는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꼬마 니콜라]에서 알아채지 못했던 상뻬 특유의 감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르카르팡티에와의 인터뷰를 통해 종종 놀라울만큼 감성적이고 섬세하며 서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가령 르카르팡티에가 '우수'라는 단어에 대해 언급하자 상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바로 사람들이 그 말에 놀라는 게 놀랍기 때문이에요. 우수와 향수는 인생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보내는 좋은 순간에는 분명 우수가 깃들어 있어요. 아주, 아주아주 행복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이 순간도 역시 지나갈거야>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거든요. 그건 마치......향기가 날아갈까 두려워 마개를 열지 못하는 포도주, 빛에 노출시키지 말아야 하는 그림들처럼......그런 거에요.

그런 서정성과 우수는 인터뷰 뿐만 아니라 표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1981년에 실린 표지 중 어린 발레리나 소녀들이 무대 위로 등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요, 계단 한 구석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발레 슈즈를 신고 있는 듯한 모습이 그렇게 와 닿을 수 없는 거에요. 어떤 행사에서 풍선을 하늘로 날려보내야 하는데 오직 한 명의 소년만이 풍선을 꽉 쥐고 고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이나, 복잡하고 바쁜 거리에서 홀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신사의 여유로움, 무대 위의 공연을 위해 그 뒤에서 고생하는 스텝들을 그린 표지, 홀로 방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고양이 그림 등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감정들이 그림을 통해 전달됩니다. 이를테면 그는, 상뻬는,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인 거죠. 그 점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상뻬는 삽화가가 아니라 예술가로 불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단편적인 세상이 아니라 그 뒤의 세계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라면, 이미 예술가로 불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한 장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포근함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 오늘날 그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뉴요커>에서 살아남은 이유, 많은 나라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 세계적인 삽화가로 칭송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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