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회귀천 정사 ㅣ 화장 시리즈 1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유독 독특하고 아름다운 표지를 자랑하는 책이지만 공공장소에서 꺼내들고 읽기에는 괜히 부끄러워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유는 바로 정사(情死) 라는 단어 때문. 정사(情死) 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가 동반 자살하는 일 을 가리키지만, 책의 표지에는 힌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정사(情事) 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혈기왕성한 10대 아이들이 가득한 학교에서 당당하게 책을 꺼내들고 보기란, 괜한 자격지심이 느껴지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덕분에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서정적인 표지의 이 책을, 한동안 사용하지 않던 북커버를 꺼내 끼워넣어 힘들게 읽어야 했다는 슬픈 이야기.
연인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해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는 안타까우면서도 오싹해지는 소재다. 꼭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어디 멀리 도망이라도 가서 살아볼 생각은 못했던 걸까, 정사(情死)의 주인공인 남녀가 과연 양쪽 다 죽음을 원하기는 했을까. 만약 한쪽만 죽음을 원하고 다른 한쪽은 죽음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상대방에 대한 의리나 더 이상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연민 때문에 반강제로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상황에서, 정사(情死) 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 등,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꽃을 소재로 한 화장(花葬) 시리즈 답게 각 단편의 제목들이 꽃이나 나무들로 지어져 있다. 작가인 렌조 미키히코의 꽃을 소재로 한 8편의 단편은 일본 미스터리 사상 가장 아름다운 단편으로 손꼽힌다는데, 이 책에 실린 <회귀천 정사>로 제34회 일본추리작ㄱ가협회상까지 수상했다고 한다. 이 작품 안에 실린 단편들이 모두 화장(花葬) 시리즈인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제5회 요시카와에이지문학신인상을 수상한 <달맞이꽃 야정>은 실려있지 않다. 처음에는, 아무리 꽃을 소재로 한 단편집이라 해도 소재가 정사(情死)인만큼 어두운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단편들이라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했었는데, 그런 어둠의 기운보다 한 폭의 그림처럼 서정적이고 안타까운 사랑이 있을 뿐이었다.
가여운 사람들의 소식을 대신 전해주는 대필가와 오랜 세월 남편의 병구완으로 지친 아내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등나무 향기>, 마음에 품은 오직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끔찍하면서도 애틋한 살인사건 <도라지꽃 피는 집>,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질긴 인연에 관한 이야기 <오동나무 관>, 빗나간 사랑과 그릇된 모정이 부른 비극 <흰 연꽃 사찰>, 근대가 낳은 천재 가인 중 하나라 불리는 소노다 가쿠요의 노래를 향한 몸부림의 <회귀천 정사>. 이 다섯 편의 이야기는 한 번에 몰아서 재빨리 읽는 것보다, 하루에 한 편씩, 가능하면 오랜 시간 음미하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도저히 사람의 마음이라고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한편 한편을 음미하다보면 이런 것이 일본인들의 정서인가 싶으면서 애틋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번역이 완전히 매끄럽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림같은 묘사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생각한다.
-문학적 향기가 감도는 가운데 놀라운 진상이 드러난다-고 평한 일본작가 온다 리쿠의 말대로 꽃향기가 아스라이 퍼지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예상치 못한 진실이 드러날 때, 그 슬픔에 공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사람의 피가 있어야만 피어나는 꽃처럼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또 무엇인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오묘한 진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그 무엇을, 꼭 발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