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슬립
폴 트렘블레이 지음, 이소은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음.음?음. 참으로 애매한 분위기의 소설입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대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첸들러의 [빅 슬립]에 바치는 오마주라 하여, 정말 엄청난 사건과 굉장한 추리력을 보여줄 거라 믿었는데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네요.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주인공의 회고록, 일종의 성장소설이라 보여지는 작품입니다. 어쩌면 레이먼드 첸들러의 작품이라곤 한 권도 읽지 않은 저의 탓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아리송한 이야기인 것만은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표지에 그려진 주인공의 한쪽 얼굴이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어 처음엔 그림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림자를 보라색으로 칠할 리 없잖아요? 그래서 다음엔 화상자국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화상자국도 아니더이다. 주인공인 마크 제네비치는 탐정입니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조금 절고 얼굴에 상처가 남은 불운한 사나이죠. 불운이 외모에서 그쳤다면 좋았으련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어요. 바로 기.면.증. 요즘 들어 제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 증상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잠들어버리는 증상인데요, 요즘 자꾸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가 없어서 '혹시 이게 기면증의  초기 증상이 아닐까' 생각하던 참이었답니다. 하지만 마크의 증상을 보니 저는 기면증은 아닌 것 같아 일단 안심은 됩니다. 잠을 자면서도 돌아다니고 말을 하고 글을 적을 수 있는 마크에게 어느 날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잠들어 있는 그에게. 

깨어난 마크는 자신에게 일을 의뢰한 손님이 '아메리칸 아이돌'에 출연하고 있는 제니퍼 타임스라고 생각해요. 일종의 환각을 본 거죠. 그녀가 놓고 갔다고 생각되는 사진들 속에서 마크는 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누군가 사진으로 제니퍼를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제니퍼와 그의 아버지 빌리 타임스는 사진 속의 여자가 제니퍼가 아니라고 부인하죠. 그런데 제니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빌리는 사진을 찾기 위해 마크를 협박하고, 사무실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마크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그것'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것'을 찾아달라고 의뢰한 진짜 주인공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설리반이지만 마크와 만나기로 하기 전날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상처투성이 몸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이제 마크는 기면증과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타인들과 한데 엉켜 지지고볶고 해야 해요. 

이 소설은 추리같기도 하고 스릴러같기도 하지만 사건중심이 아닙니다. 사건이 약 30% 정도, 그리고 마크가 중얼중얼 웅얼웅얼 시니컬하게 읊조리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여전히 인정하기 힘든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부분이 70% 정도라고 할까요. 분명 험악한 상황이 맞는데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마크의 시니컬한 빈정거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잃지 않는 유머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전혀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해도요. 어쩐지 여유로운 그의 언행에서 사건은 어떻게든 해결되겠구나, 싶어집니다. 그러니 이 작품은 아마 마크의 성장소설이 맞을 거에요. 다 큰 어른이지만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새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마크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 지 알게 된 그 순간, 두 번째 탄생이 이루어진 게 아닐까요? 

이 작품이 시리즈가 될 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옮긴이의 말대로, 다음 번 의뢰인은 부디 맑은 정신에서 맞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맑은 정신으로만 의뢰인을 만났어도 이 사건도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을테니까요. 그나저나. 질이 너무 좋아서 잉크가 손에 묻어나올 뻔한 종이였어요. 개미도 미끄러지겠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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