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러시안 윈터
대프니 캘로테이 지음, 이진 옮김 / 시작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땐 저도 발레리나를 꿈꿨습니다. 냐하하하
가녀린 몸과 긴 팔다리, 하얗게 빛나는 튀튀와 핑크빛 발레슈즈는 저의 선망의 대상이었죠. 그 때는 어렸으니 핑크빛 발레슈즈 속에 숨겨진 길고 긴 고통의 시간들을 알리 없었지만 저도 우아한 백조가 되고 싶었답니다. 소녀들을 겨냥한 소설들 중 주인공 대부분이 발레리나였다는 것도 아마 한 몫했을 거에요.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레리나를 꿈꿔보지 않았을까요? 발레를 배우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조금 배워놓았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뻣뻣한 몸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러시안 윈터]의 주인공은 발레리나입니다. 암울했던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오직 발레만이 전부였고 사랑에 몸을 던진, 실력있는 무용수 중 한 명이었죠. 젊은 시절 그토록 찬란하게 빛났던 그녀의 몸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운신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녀가 가진 상처와 고통이 몸을 더 무겁게 만들었을지도 몰라요. 러시아의 시인 빅토르 엘신의 아내이자 완벽한 발레리나였던 니나. 현재 그녀는 미국에서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병든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눈에 반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던 빅토르와 니나. 왜 지금 니나 옆에 빅토르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니나라면 그리고리는 현재를 살고자 하는 남자,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오랜 세월 그 뿌리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그는 진실의 단서가 니나에게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니나는 그리고리를 거부하죠. 니나와 그리고리, 그리고 그리고리의 부모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서서히 덮여있던 장막을 거둡니다. 그 장막 뒤에 웅크리고 있던 진실은 오랜 세월을 고통과 상처, 후회와 배신감으로 몸부림쳐 온 니나의 마음을 치료해주는 한편, 더 큰 후회를 남기게 될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주변상황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혹은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정을 내리기 전에 상대방에게 한 번 더 물어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오해로 인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 번만 더 그 사람을 만났더라면, 내가 알고 있는 건 이것인데 혹시 내가 잘못알고 있는 거냐고 물어봤더라면. 그런 후회들을 남기지 않기 위해 우리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자존심? 두려움? 오해로 수 십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자존심을 버리고 두려움을 이기려는 용기가 필요해요.
2009년 런던도서전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러시안 윈터]는 전개가 조금 느릿느릿해서 초반에 몰입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여운이 참 크네요. 인생이 대체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지, 안타까움과 애틋함으로 가슴 한 쪽이 아릿아릿합니다. 오직 사랑이 없는 곳에만 비극이 있다는, 옮긴이의 말이 무겁게 다가오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