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기리노 나쓰오 여사의 작품은  [얼굴에 흩날리는 비] 로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만났던 작품 [리얼월드] 의 여파로 거의 앓아눕다시피 했던 저는, 그 뒤로 기리노 여사를 기피(?)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후 이 분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힘들어져서 안 돼. 아프면 큰일나' 라는 마음으로 피해왔었죠. 책날개 사진을 보세요. 이 얼마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얼굴입니까. 일본 하드보일드 작가 중 여성으로서 그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기리노 여사이지만 저에게는 멀기만 한 당신이었습니다. 특히 무라노 미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 중 한 편인 [다크] 가 '괴물같은 인간들의 악의가 두드러진다'는 평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얼굴에 흩날리는 비] 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 책을 집어들었던 이유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하리만치 아무 거리낌없이 쭉쭉 읽어나갔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 작품은 권일영 옮긴이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청순하다'고 느껴지리만큼 감정의 자극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리얼월드] 에서 의도치 않게 어머니를 죽이고 도망치게 된 소년이 보여주었던 어둠. 몸 속 깊은 곳에 파고들어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늪으로 저를 끌어들일 것만 같던 그 어둠과 악의를 [얼굴에 흩날리는 비] 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물론 탐욕스럽고 잔혹한 인간들은 등장합니다만, 다 읽고 나서 앓아누울 것 같은 기운을 전달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점이 기존에 제가 기리노 여사에게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깰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여사의 본격 미스터리 데뷔작이니만큼 그 강도가 약한 것일 테죠. 여사의 강렬한 글솜씨에 이미 빠져있는 분들은 어쩌면 이 약한 수위가 아쉽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저의 입장에서는 여사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뜻깊은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헴.

더불어 '미로'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아무리 괴물같은 인간들의 악의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라고 해도 시리즈를 다 읽어보고야 말겠다는 기분이 들어버렸습니다. 미로는 좀 복잡한 인물입니다.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아파트에서 세월을 보내는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라는 상처에 갖혀있죠. 책날개에서 본 기리노 여사의 얼굴이 쉽게 잊혀지지 않아서 이 미로도 어쩌면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강한(척 하는) 얼굴 뒤에 숨어있는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관찰력, 그리고 용기와 행동력이 그녀의 매력을 한층 더해준답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받지 못한 한 통의 전화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되죠. 일명 '친구 요코 찾기 작전' 이랄까요. 

늘 그렇듯 사건의 발단은 인간의 잔인한 욕망이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특히 그 잔인한 욕망 뒤에 숨어있는 것이 '돈'일 때는 더욱. 물론 저도 돈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있으면 좋죠. 지금같아서는 차도 한 대 사고 싶고, 비가 새지 않으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책과 앞으로 살 책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법을 어기거나 누군가를 해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가 좋고, 차 한 잔 즐기면서 리뷰 쓰는 시간이 즐거운걸요. 사람 안에는 늘 두 개의 얼굴이 존재하니 인간의 본성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 씁쓸해지곤 합니다. 

앞에서 감정의 자극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오컬트적 세계가 조금 펼쳐지고, 보기에 따라 조금 거부감을 가질만한 요소도 등장하거든요. 저 또한 그 부분은 속이 살짝 좋지 않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아, 힘들다' 라는 느낌을 받지는 않을 거에요. 

지금 당장 [다크] 를 읽어보고 싶지만, 저는 조금 더 기다려보렵니다. 비채에서 이 미로 시리즈가 순차적으로 나온다고 하니 쪼콤만 더 제 마음을 단련시킨 후에 도전해보려고요. 섣불리 덤볐다가 또 앓아눕는 수가 있으니까요. 흐흐. 그나저나 이 표지. 정말 마음에 듭니다. 저 파란 색이 차가워 보이면서도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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