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되어야 할 수학여행이었다. 선생님 눈을 피해 친구들과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추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 아키바 가나코. 한밤에 들려온 소식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이제 그녀가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가나코의 아버지에게 원한을 가진 쓰즈키 노리오가 집에 침입해 가나코의 아버지, 엄마, 두 남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이다. 그 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갖게 된 가나코는 수학여행지에서 죽은 가족들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 이동한 '네 시간'을 때때로 현실처럼 겪게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지만 자신이 죽은 가족들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도 되는 건지 죄책감을 안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범인 쓰즈키 노리오에게 자신과 같은 나이의 딸, 쓰즈키 미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체를 숨기고 쓰즈키 미호에게 접근하는 가나코. 

일본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드라마 <연애시대>로 유명한 노자와 히사시의 이 작품은, 가해자의 딸과 피해자의 딸이라는 다소 독특하면서도 잔혹한 설정 속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는 초반 범인 쓰즈키 노리오의 상신서를 통해 그가 아키바 일가에 품게 된 원한과 살인을 하게 된 계기 등을 보여주는데, 이 시점부터 독자들의 판단력을 시험한다. 과연 진정으로 나쁜 사람은 누구였을까, 생명을 앗아간 것은 나쁘지만 쓰즈키 노리오만 악인이었을까. 그런 어지러운 상황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이 목숨을 잃은 어린 두 동생과 홀로 살아남은 가나코의 존재다. 아무리 원한이 깊어도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의 생명을 빼앗고, 주인공 가나코가 온 가족을 잃고 혼자 남게 만든 점등을 강조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우선 깨닫게 한다. 

이 책의 띠지에는 전반부의 참극묘사가 25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압도적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는데, 나는 전반부의 참극묘사보다도 사건을 듣게 된 어린 가나코의 심적 상태와 원수의 딸인 미호에게 접근하는 그녀의 심리를 서술하는 쪽에 후한 점수를 주겠다. (어째서 잔인한 참극묘사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겠다고 했는지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자신이 겪어온 고통의 세월을 범인의 딸인 미호는 어떤 마음으로 지내왔을 지 궁금해하고, 범인이면서도 여전히 아키바 일가를 미워하는 범인과 그의 딸을 저주하며 깊은 어둠으로 끌어내리고 말겠다는 가나코의 마음이 아프도록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가나코는 결국 그들의 악연을 끊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을 지, 그 과정을 긴장감 가득하게 팽팽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하지만 결국 가나코와 미호가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모습을 그린,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뻔히 그려질 수도 있는 용서와 화해를 그리지 않는다. 서로에게 원망을 토해내고 사죄를 하는 식상한 장면도 없다. 그저 그녀들 각자의 고통의 세월을 그리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뿐이다. 미궁 속을 헤매는 듯한 몇 문장들로 인해 번역이 다소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분위기와 내면 묘사가 괜찮은 작품이다.


 

 있지 미호, 우리 가족은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어. 내가 달려갔을 때에는 모두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지.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가족들의 심장이 뛰어주길 바랐어. 나도 모두의 가슴에 귀를 대고,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물어보고 싶었으니까. 나, 이제부터 살아가도 되냐고. 모두의 심장은 이제 곧 멎어버릴텐데, 난 앞으로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돼. 살아남아서 미안해. 난 모두의 용서를 바랐어.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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