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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몽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허몽 : 사실과 다른 꿈.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을 꿈으로 꾸는 것.
이 책을 읽기 전 '통합실조증(정신분열증)'을 가진 범죄자에 대한 저의 입장은 확고했었습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는 것. 자신에게만 관계된 일이라면 상관없지만,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고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간 책임은 져야하지 않을까. 만약 통합실조증을 이유로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한다면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할까. 또한 인간의 마음을 인간이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어떤 기준으로 통합실조증이라 판단할 수 있는 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다른 입장은 생각할 것도 없었죠. 범죄는 범죄, 떠나버린 사람은 돌아올 수 없고 모든 고통과 슬픔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니까요.
사와코는 하얀 눈이 예쁘게 쌓인 어느 겨울, 사랑하는 딸 루미를 잃었습니다. 통합실조증을 앓고 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 후지사키에게. 루미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사와코는 등에 상처를 입고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으며 그 일로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남편 미카미와 이혼하기에 이르죠. 미카미 또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사건이 일어난 후 4년. 길에서 우연히 후지사키와 마주친 사와코. 루미를 죽인 범인이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 또 다시 소용돌이치는 사와코의 마음. 처벌받지 않은 가해자 앞에서 사와코와 미카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드라마 <브레인>을 떠올렸습니다. 사고로 머리를 다친 한 남자가 뇌의 한 부분이 활성화되어 그 능력을 활용해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인데요, 에피소드 중 하나가 이 책과 설정이 아주 비슷하거든요. 그 드라마에서는 범인이 다중인격자인 척 가장하고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 펼쳐졌는데, 결국 주인공이 그 범인이 다중인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버린 겁니다. 결국 그 범인은 체포당하고 형을 살게 되죠. 그 드라마를 보면서도 그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형법이라는 것이 참 허술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책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의 상태 자체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인데, 어떤 기준으로 '완전한' 심신상실자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심신상실자라고 해도 엄격하게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생각하려해도 간교하고 잔혹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심신상실자로 등장한 후지사키에게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의 진심과는 다르게 세 명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아홉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사실을, 그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현실에서 숨쉬고 있는 또 다른 후지사키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지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중간과정이 조금 늘어진다 싶지만 속도감이 굉장한 작품이에요.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저에게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었고, 무엇보다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아주 굉장하다 싶지는 않지만 꽤 괜찮았습니다. 형법의 헛점을 찌르는 반전이라고 할까나요. 이 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천사의 나이프]는 [허몽]을 능가하는 수작이라고 하던데 책장에서 꺼내 펼쳐줘야 할 것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한 순간 더위를 잊기에 알맞은, 마지막을 향해 치달아갈수록 '허몽'이라는 작품의 의미가 가슴 깊이 들어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