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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vs 역사 - 책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책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뤼디거 마이 지음, 배진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여전히 좋아하는 책 가운데 [페이지마스터] 라는 아이가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이 [페이지마스터] 속에 등장하는 책들은 사람처럼 눈, 코, 입이 달려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에 따라 각기 고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해적과의 싸움이 그려진 모험책이라면 한 쪽 눈에 안대를 차고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표지를 가지고 있었고 말투도 걸걸했으며 (이 책에서는 모든 책들이 말을 할 줄 알았다) 성격도 터프했다. [페이지마스터]를 읽은 후부터 나는 줄곧 책들에도 생명이 있다는 생각을 해 왔었다. 우리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 되면 책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들만의 잔치를 즐길 거라고. 오랜 세월을 인류와 함께 보내온 책들. 그 책들이 [책 vs 역사] 라는 이 책을 보게 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헹! 역사를 만들어낸 건 다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라고!'
-책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책-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책 vs 역사]는 역사 속의 책, 책이 만들어낸 역사를 바라보는 일종의 시간여행이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까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책들이 가지게 되는 특성들도 변화한다. 기억의 기록이 시작되는 고대가 기록하는 일과 신과의 영적인 결합에 큰 의미를 두었다면, 중세에서는 '암흑의 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종교를 위한 책에서 학문을 위한 책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산업혁명과 함께 일어난 근대의 시작, 그 시대를 규정하는 책들이 국가와 개인, 이성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종류였다면 현대에서는 좀 더 실용적이고 생활에 밀접해진 모습으로 변모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어느 시대든 온갖 종류의 책들이 등장하고 칼로 자른 듯 ' 이 책은 어느 시대에 더 어울려'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느낌이 이렇다는 이야기다.
책에 관한 사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책' 그 자체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두 저자는 한 권의 책을 소개할 때마다 그 책에 얽힌 이야기, 시대적인 배경, 그 책이 미친 영향 등을 심도있게 서술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성서는 물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윌리엄 하비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논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등의 깊이 있는 책들부터 J.K. 롤링의 [해리포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말괄량이 삐삐],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좌절과 몰락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 등의 익숙하고 재미있는 문학 작품들까지 많은 종류의 책들과 마주할 수 있다. 책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고, 역사를 통해 책을 바라보는 시간은 유익했다. 잘 모르는 책들도 있었고, 한 번 읽어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상과 지식을 간직한 책들도 있었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그 책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 또한 반갑다.
요즘에는 전자책이다, 아이팟이다 해서 종이로서의 책의 존재가 살짝 위협(?)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지금 형태의 '책'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책 속에 담긴 가치는 소중하며 그 가치를 진정으로 맛보기 위해서는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아무리 편리하고 간편한 것들이 속속 발명되는 시대가 도래한다 해도 책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우리 인류의 모습을 굳건히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다. 한 시대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단 하나의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