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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록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이상한 소설이다. 마지막 여자의 독백(이라고 할지, 편지라고 할지) 부분을 읽고 난 후 맨 처음 든 생각은 '이게 뭐야!'였다. 잔인하게 일가족을 살해한 사람의 동기가, 여러 사람을 인터뷰한 인물의 목적이 고작 그 때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인간이란 어디까지 이기적이고 잔혹해질 수 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행태에 내 이해심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트릭이 생각보다 싱거웠던 것인지, 또 그런 것도 아니라면 그 동안 읽어왔던 추리소설들의 소재와 전개가 너무 뛰어나서 상대적으로 이 작가의 이 작품이 대단치 않게 느껴지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뷰를 올려야지 하며 며칠을 곱씹는 동안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누군가를 해친 그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살아가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때로는 즐거워도, 가끔은 피할 수 없는 숙제 같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늘상 즐겁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일까. 지금 이 순간 이 사람과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아무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어차피 이 사람은 남이라는, 그런 어두운 생각이 불시에 고개를 들기도 한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어떤 한 부분을 보고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평가할 때, 우리는 상처받는다. 물론 그들이 평가한 한 때의 그 모습도 나의 일부이겠지만 누구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얼굴이 달라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우리는, 한결같기를 원하고 한결같기를 요구한다. 사람의 마음 속이 얼마나 복잡하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한 집에서 일가족 네 명이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엘리트 남편과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 귀엽고 예쁜 두 아이의 가정이 어느 날 사라졌다. 범인은 잡히지 않고 단서조차 보이지 않을 때, 누군가가 그 사건을 소재로 주위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그들 가족을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는 동네 아주머니, 우아한 부인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질투의 감정 또한 가지고 있었을 동년배의 부인, 엘리트였던 남편을 상냥하지만 때로는 기회주의자로 기억하는 회사 동료와 옛날 연인, 부인을 적대시했던 대학 동창 등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이 가족에 대해 기술한다. 때로는 동경을, 때로는 질투를, 때로는 폄하의 눈을 가지고.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생각한 것은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었다. 친구들끼리 놀다보면 갑자기 감정이 틀어져 '이 바보, 멍청이, 돼지!!' 등등의 깜찍한(?) 말을 내뱉던 때가 있지 않던가. 그럴 때 친구를 더 약올리기 위해, 혹은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그럼 너는 부처님해,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니까 난 부처님이야'라는 말을 했던 적은 없었나.
인터뷰이들은 각자가 객관적인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이 바라본 네 명의 가족은 자신들의 감정을 그대로 투영한 존재들이었다. 그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친하게 지냈지만 나는 결코 저 사람같은 미모나 재력은 가질 수 없다는 괴로움, 때문에 그 사람이 나를 무시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쪽에서 그 사람을 안중에도 없다고 생각한 왜곡된 기억들이 인터뷰이들이 진술하는 내용에 의해 오히려 그들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결코 하나가 아니고, 아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표지의 문구가 이해되는 내용들이다.
인터뷰와는 별개로 한 사람의 진술이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한 여성의 고백은 사건과 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녀의 과거에 연민을 갖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한 행동으로 한 가족을 몰살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누쿠이 도쿠로의 [통곡]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번 이야기에서 그 점이 조금 아쉽다.
우행록-어리석은 행동을 기록했다는 이 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국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을 것, 모든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왜곡된 마음을 가지지도 말고, 남의 것만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타인의 행동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다'는 너그러움을 갖는 것. 우리가 누구를 감히 평가할 것인가. 자신이 남긴 발자취조차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면서.
하지만 책 속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을 우행록이라고 보기에는, 우리는 매일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고, 그저 안타까운 일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