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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사우스 브로드]라는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처음으로 미국문학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다, 굉장하다가 아닌 '아름답다' 라고 느낀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지만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 하지만 내가 접한 미국문학은 순수문학보다 흥미위주의 책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미국문학의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사우스 브로드]를 읽고 나서는 '이게 미국문학의 정수라는 걸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미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는데, 이번에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미국편>을 통해서 더 깊이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창비에서 출간된 세계문학전집은 다른 출판사의 책들과는 달리 각 나라의 단편만을 모아서 엮은 것이다. 미국편을 읽기 전에 일본편도 읽었었는데, 일본편은 표기와 번역이 영 매끄럽지 못해 읽는 내내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미국편은 눈에 거슬리는 표기 몇 개를 제외하고는 문체도 나름 매끄럽고 번역자가 고심한 흔적이 보여 차근차근 읽는 맛이 났다. 그 흔적이란 표제작 <필경사 바틀비>의 "I would prefer not to" 를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 로 옮기기까지 몇 년에 걸쳐 고심했다고, 해설 부분에서 번역자가 토로한 부분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문장이 없었다면 <필경사 바틀비>의 독특한 분위기는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편도 그랬지만 미국편 역시 내로라 하는 작가들의 단편이 실려 있다.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 애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마크 트웨인의 <캘레바레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헨리 제임스의 <진품>, 샬롯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 찰스 W. 체스넛의 <그랜디썬의 위장>, 스티븐 크레인의 <소형 보트>,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유명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겨울 꿈>,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 까지 각양각색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한 두 작품은 미국의 역사와 시대배경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빼놓고 거의 대부분 '재미있다'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앞서 언급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이다. 변호사의 시선으로 필경사 바틀비라는 독특한 사람에게 주목한 이 작품은 세계문학 중 가장 뛰어난 단편으로 꼽히며 바틀비의 모델이 누구냐에 대해 꽤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듯 하다. 바틀비와 변호사에 대한 해석도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지며 변호사와 바틀비의 대화, 바틀비의 말투를 중심으로 책을 읽다 보면 오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유머와 기이한 상황으로 인해 몇 번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하며 각 상황에서 자주 쓰이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어구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보면 언어의 신비함에 다시 한 번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어렸을 적 읽은 애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오싹하고 공포스러우며, 샬롯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 또한 밤에 혼자 읽으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벽지에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찰스 W. 체스넛의 <그랜디썬의 위장>은 주인공 딕 오언즈가 여자 친구 채러티의 관심을 사기 위해 아버지 소유의 흑인 노예 그랜디썬을 캐나다에 도망치도록 유도하지만 엉뚱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분명 흑인 노예에 관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텐데 문체와 분위기가 희화적이며 놀라운 반전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보통 단편작품집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거나 정말 재미있다고 소문난 책이 아니면 읽지 않는 편인데, 미국편도 그렇고 일본편도 그렇고 어느 정도의 재미는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일본편은 작품 자체보다 표기와 번역의 탓이 컸다;;) 총 9권으로 기획된 창비세계문학전집, 두 권을 읽고 나니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도 기대된다. 아울러 깊이있는 미국작가들의 다른 작품들도 선정해 한 권씩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