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앤서니 밍겔라 감독, 랄프 파인즈와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1997년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한 이 영화는, 그러나 사실, 나에게는 깊은 감흥을 주지는 못했었다고 기억된다.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10대의 나는 어렸던 탓도 있겠지만 내 머리 한 구석에는 '그 영화는 나와 맞지 않았어' 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책으로는 느낄 수 있을까 하여 손에 집어든 원작소설. 늘 그렇듯 책과 영화에 대한 감상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겠지만, 책은 영화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있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는 영국인 환자 알마시와 캐서린, 알마시를 간호하는 해나와 젊은 군인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책에서는 알마시와 해나, 공병인 킵, 그리고 스파이로 활동했던 카라바지오가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홀로 알마시를 간호하는 해나에게 아버지의 친구인 카라바지오가 찾아오고 폭탄해체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도인 공병 킵이 머무르면서 네 명은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전쟁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어 황폐해진 마음을 핥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리고 알마시가 사실은 독일 첩자가 아니었을까 의심하면서. 

알마시와 캐서린의 사랑, 해나와 킵의 사랑도 작품 안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소재임에는 확실하다. 전쟁 속에서 자신으로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해 준 것, 누군가에게 기대고 위로받고 싶게 만드는 것, 그 모두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비롯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와는 달리 작품 안의 네 사람은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일 뿐이다. 알마시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잃었고, 해나는 아버지를, 카라바지오는 손가락을, 인도인이지만 영국인과 함께 싸우는 킵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잃었다.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크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모두와의 생활을 통해 평안과 위로를 얻고자 발버둥친다. 

이야기의 주체는 알마시이기도 했다가 해나가 되기도 했다가 때로는 카라바지오, 때로는 킵이 된다. 시선과 공간, 시간 모두가 경계없이 자유롭다. 결말부분처럼 다른 공간의 사건이 같은 시간대에 서술되기도 하고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역자는 그것을 '다중성'이라고 표현했는데, 나에게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가 마치 둥근 유리구슬 안의 장식품들처럼 다가왔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격렬한 감정의 변화도 잘 느껴지지 않고 그저 삶을 이어갈 뿐이던 등장인물들의 테두리가 어느 날 '원폭'을 계기로 깨져버리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서로를 돌보고 치유하려던 그들이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것 같은 느낌. 

이 작품은 전쟁소설이자 연애소설이기도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소설이기도 하다. 그 '다른'에 대해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 어렵고, 어렵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깊이 있고 고요한, 색다른 매력의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