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읽은 [페이지 마스터]라는 책이 떠오른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주인공 소년이 살아있는 책들과 모험을 한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매컬리 컬킨 주연의 영화도 나왔었던 것 같은데 나에게는 역시 영화보다는 책이 더 매력적이었다. 책도 커다랗고 글씨도 크고 올컬러판이라 눈에 쏙쏙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어쩌면 책에게도 생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처럼 눈, 코, 입이 있고 생각도 할 줄 알고, 나쁜 책과 좋은 책이 있어서 서로 싸우기도 하는 책들. 그 책들은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 지 궁금하기도 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여기에 스스로 책이 되어버린 남자가 있다. 남자가 처음부터 책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어느 벼룩시장에서 한 여자가 죽고 남자는 그 자리에서 어떤 책을 발견한다. 보는 순간 갖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남자. 그는 그 책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책에 몰두한다. 눈과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철자들과 책을 얻은 첫날밤 꾼 기이한 꿈들. 그 후 몸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질병이던 허리통증이 심해졌고 급기야는 고통이 척추로 번지기 시작했으며 온 몸에 압통이 느껴졌고 키도 점점 작아졌다. 더욱 기이한 일은 그 동안 애지중지하던 책들을 헐값에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육체의 고통은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어느 날, 남자는 책으로 변하고 만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책으로서 시작된 남자의 새로운 생활. 

책으로 변하는 남자의 과정은 기묘함을 넘어서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어쩐지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표지가 인상적으로, 남자 뒤에 엄청난 책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마치 남자가 금방이라도 책 속으로 빨려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팔과 다리는 경직되며 움츠러들고 온 몸에 끔찍한 고통이 번지면서 책으로 변화하지만, 의외로 남자는 자신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것들이 책의 내용이 되어 그를 거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남자의 생각은 그를 손에 든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보여진다. 그것은 남자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남자가 그렇게 마음을 먹는 데 일조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주인'들이었다. 마치 한 권의 책이 여러 사람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가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가 책이 되기 전, 책이 된 후, 그리고 결말이 제시되었을 때. 그 경우는 각각 우리의 독서생활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눈이 아니라 책의 눈으로 독서가들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데, 한편으로는 가장 훌륭한 책, 가장 의미있는 책은 우리 인간의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자가 책이 되어 그 자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였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한 권 한 권의 책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벼룩시장'에서 이루어진다. 벼룩시장은 자신이 필요없는 물건들을 싼값에 내다 파는 곳이다. 그 곳에 나와 있는 옷, 책, 생활용품들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시간만큼 책장에서, 옷장에서, 창고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었을 것이다. 사용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본래의 가치를 유지할 수 없다. 책도 읽지 않고 책장에만 꽂혀 있다면 더 이상 책이 아니라 종이뭉치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 책장 안도 읽지 않은 책들이 넘쳐난다.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벌어진 그 일은 어쩌면 내 책장과 다른 사람들의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의 복수(?)일지도. 

표지 그림으로 인해 살짝 중압감을 느꼈는데 책 속 일러스트는 의외로 안정적이고 따스하다. 페이지 자체도 약간 황토색을 띄고 있고, 일러스트의 색감이 따스한 나무색이라 그런 지 표지를 처음 봤을 때처럼 위축되지는 않는다. 일러스트로 인해 책의 분위기를 한층 깊게 맛볼 수 있다.



   운명이란 바로 그대들이 지닌 책, 책은 저마다 운명을 품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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