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그먼트 -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
워렌 페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모든 사람들의 혐오의 대상일 바퀴벌레는 말할 것도 없고 파리나 모기, 참깨만한 날벌레에 이르기까지 일단 눈 앞에 보이면 몸이 경직되어 버리는 것이다. 심장은 빠르게 쿵쿵 울리고 ,머릿속은 몇 바퀴 회전을 하며 눈 앞의 적을 어떻게 퇴치해야 할까 고민해야 하겠지만 일단 소리부터 냅다 지르고 본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버둥. 어떤 때는 까만 비닐봉투 조각을 보고도 경기를 일으킨 적이 있을 정도다. 벌레에 대한 나의 반응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게 없어서 가끔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오지만 어쩌나. 무서운 것을(ㅠ.ㅠ)  그래서 이 책의 표지만 보고 나는 처음에 마음을 정했었다. '이렇게 징그러운 것들을 소재로 하다니! 재미없을 거야! 대충 읽어줄테다!' 라고. 하지만. 이런. 사과부터 해야겠다. 미안하다, 오해했다. 대충 읽어넘길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징그러운 것들은 여전히 싫지만 그것만은 인정해줄게. 

이 책은 지금까지 상상만으로 그쳤을 치명적인 '다른 종'에 관련된 이야기다. 미지의 섬으로 남아있던 헨더스 섬을 탐험하기 위해 섬으로 들어간 식물학자 넬과 그녀의 동료들. 그 곳에서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각종 생명체들이 발견되고 리얼리티 TV 쇼 <시 라이프>의 출연자였던 넬과 친구들은 괴이한 그들에게 공격을 받고 넬과 카메라맨 제로를 제외한 나머지가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생방송으로 전 세계로 방영된 학살장면에 조작여부에 관해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헨더스 섬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과 동물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다. 그리고 발견된 한 생명체. 

처음 영화 <쥬라기 공원>을 봤던 때가 생각난다. 책이나 영상으로만 접했던 공룡이 어느 날 불쑥 눈 앞에 나타났을 때의 놀라움과 호기심, 그러나 시작되는 공격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공포스러웠다. 여기 저기서 출몰하는 공룡에 겁을 먹었고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오들오들 떨어야 했었다. 이 책은 그 때의 '공포'를 되살아나게 한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을 공격하는 존재는 공룡보다 몇 배는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인간의 손에 의해 오염되지 않아 그들 나름대로 진화와 번식을 계속해 온 미지의 섬. 책에 따르면 지구 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도 헨더스 섬의 종을 이길 수 없다는데, 정말 그런 섬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 쓸 데 없는 걱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작품이 사실적이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요상한 벌레와 짐승들의 그림은, 대단하긴 하지만 생각도 하기 싫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내 몸 여기저기를 기어다닐 것 같아서. 

영화가 시작하는 것처럼 빠르게 전개되는 속도감이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시 라이프>의 출연진들이 대거 소개되면서 이 사람들 이름을 다 외워야 하나 고민스러웠으나 대부분이 공격을 받고 사라진다. 여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었던 전개. 그 다음은 분명히 주인공이 괴생명체들을 죽이고 섬에서 탈출하는 전개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라. 어떤 생명체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공포 학살 스릴러가 아닌 휴먼 드라마로 바뀐다. 오홍. 그런데 그것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가슴 한 구석을 뭉클.하게 만든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어떤 존재를 끝까지 보호해주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이랄까. 갑자기 시작되는 남자주인공에 대한 여주인공의 유혹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얄미운 사람을 깔끔하게 처리해주었으니 그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가련다. 

원래 징그러운 것들이 등장하는 영화나 책은 잘 보지 않지만 이 책은 정말 우연찮게 건진 보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워하는 과학 이론들에도 흥미가 가게끔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다. 이렇게 설명하니 소설이 아니라 과학서적 같지만, 아니에요. 이 책은 테크노 스릴러라고 불리는 소설이랍니다. 다시 한 번 사과할게. 너 정말 재미있었어. 그런데 진짜진짜 헨더스 섬이라는 곳은 없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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