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비처럼 1
야설록 지음 / 형설라이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명성황후'하면 '조선의 마지막 국모, 흥선대원군에 대항한 여인,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시해당하고 정치적 평가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왕비' 라는 수식어를 흔히 떠올린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빌려 본 [나는 조선의 국모다] 라는 책에서도 민비 민자영은 대차고 강인한 성품으로 그려져 있었고, 국사시간에는 그녀가 조선을 위해 이루려고 했던 업적보다도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었다는 사실이 유독 강조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역사적인 인물에게서 그들의 사생활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들의 단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온 생애를 우리가 전부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실제이든 허구이든 역사소설의 재미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약간은 다른 감정으로 그들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조선의 국모가 아니라 한 여인으로서 한 남자를 사랑했던 민자영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천주교도 박해,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경복궁 재건 사업, 민비의 간택과 대원군과의 대립, 을미사변까지 굵직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무명'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천주교 박해로 인해 어머니를 잃고 혹독한 생을 살아왔던 무명이 신들린 듯 사람을 베어 죽이던 인생에서 벗어나 자영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험난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낯간지러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차분하게 그려져 있다. 드러내놓고 사랑을 갈구할 수 없었던 시대적 특성과 신분의 차이로 인한 두꺼운 벽을 반영했기 때문이겠지만 오히려 은은하면서도 서정적인 감정이 더 열정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무명으로 인해 여러 번 등장하는 결투 장면이다. 흥선대원군의 심복인 이뇌전과의 숙명적인 대결, 큰 부상을 입은 후 한층 성장한 검술 실력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데, 그런 장면들의 묘사가 약간 과장되었다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또 그것대로 약간 판타지적인 느낌이 살아있어 마치 한 편의 무술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하늘에는 달이 둥실 떠 있고, 그 달과 바람을 가르며 뛰어오르는 무명과 이뇌전-이라는 영상이 이 책의 분위기를 한층 고풍스럽게 만들어준다고 해야 할까. 물론 피와 살이 튀는 장면은 제외하고.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닌지 모를 무명이라는 인물과 민자영의 사랑이 주제인만큼 정치적인 상황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이 미약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요소들도 적절히 안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민비의 이야기를 할 때 국내외 정세를 제외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명의 입장에 너무 큰 비중을 둔 점이라 할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 글쓰기는 쉽지 않았을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민비의 이야기보다 무명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이것은 둘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무명의 일대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조승우와 수애가 주연을 맡은 영화의 선전을 보고 이런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어쩐지 영화보다 책이 더 멋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검술을 겨루는 긴장감과 각 인물들의 심리도, 민자영과 무명의 애틋한 감정도 글이 더 섬세하게 나타냈을 테니까. 와인과 초콜릿을 즐겼다던 조선의 마지막 여인과 그녀를 목숨처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순식간에 밤을 지새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