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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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오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조연으로 나온 배우들 중 몇몇은 내가 미드를 통해 알아온 사람들이었다. 미드에서는 주연급이었던 사람들이 조연으로 나오긴 했지만, 나는 숨겨진 사람 또 없나 하는 마음으로 꽤 즐겁게 등장인물들을 살필 수 있었던 듯도 하다. 조금 분위기가 다르지만 그건 티베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티베트는 나에게 그저 '여행'의 나라였다. 조금 독특한, 그러나 뭔가 얻을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은 고매한 성지. 사실 그 때만해도 티베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티베트 작가의 소설이라든가, 그 곳을 심도있게 여행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제야, 그 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티베트의 지나간 시간과 그들의 생활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라이의 [색에 물들다] 라는 작품의 영향이 컸다. 좋은 책들은 명확한 이유와 감정을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로 나에게 '난 좋은 책이야'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아라이의 [색에 물들다]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 작품이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면 이번 [소년은 자란다]는 조금 더 깊이 티베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모두 열 세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평소 단편집은 그다지 잘 읽지 않아서 이 책도 단편모음집이라는 것은 책을 받아보고서야 알았다. 하지만 티베트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적당한 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촌'을 배경으로 시대의 흐름으로 핍박받는 라마승, 환속해서 양치기로 변모한 라마승, 마부, 약초캐던 소녀, 라마승을 외할아버지로 모시는 평범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감정들,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도시로 올라온 노인의 향수와 인간에 대한 그리움 등이 덤덤하게 그려져 있다.
 
[색에 물들다]에 비하면 특별한 감동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승전결이라 할 것도, 소설을 읽을 때면 으레 느끼곤 했던 긴장감이나 절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수필처럼, 혹은 일기처럼 티베트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나타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점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작가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 책을 읽고나서 내가 무엇을 느끼기를 원하는가, 그냥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건이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책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무언가'를 쉽게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가 무엇이고, 무엇이 티베트인지를 한 마디로 명확히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단지 티베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장소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이 그렇고 미국이 그렇듯, 프랑스와 영국, 일본이 그렇듯, 티베트도 이 세상의 한 곳일 뿐입니다. 그곳에도 풀과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열리고 꽃이 핍니다. 풀과 나무의바다에서 사람들은 흥망성쇠를 겪습니다' 라고 적은 작가의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시대의 흐름을 거치며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라마승이 있고, 변화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누군가는 성장하면서 살아나가고, 누군가는 생명을 잃어가는 곳이 바로 티베트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심오한 명상과 고행으로 정신적인 성숙을 기도하는 현자들 뿐 아니라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이 취향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나도 이 책을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아라이가 들려주는 티베트와 티베트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그 곳의 풍경이 보이고 그 곳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색에 물들다] 와는 확연히 다른, 소박하지만 약간은 쓸쓸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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