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타임스 - 21세기 코믹 잔혹 일러스트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하나자와 겐고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오홋. 요즘 들어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다. 예전에는 재미있는 책을 읽고나면 그 여운을 만끽하느라 책을 안고 침대에서 한참을 뒹굴뒹굴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이상한 웃음소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이히, 라거나 오홋, 이라거나 냐하, 같은. 뭔가 제대로 된 감상을 말하고 싶지만 한꺼번에 많은 생각이 몰아닥쳐서 그 말을 요약한 것이 저런 웃음소리로 표현된 게 아닌가, 나 스스로 내 자신에게 고개를 갸웃. 어쨌거나 이 책 역시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난 후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유명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작품은 어쩐지 읽기 싫어!'라며 비뚤어진 고집으로 한참을 외면했었던 작가 중 하나인 이사카 코타로. 제작년이었던가, [피쉬스토리]를 읽고 나서 '내가 왜 이 작가를 모른 척 했던가' 를 수없이 되뇌이며 이사카 월드로 곧장 빠져들고 말았다. [사신치바], [골든슬럼버] 등 때로는 감성으로 때로는 유쾌함과 진지함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였던 그의 이번 작품 역시 무척 재미있었다. 게다가 일러스트는 보너스~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찰리 채플린이 등장했던 영화 <모던타임스> 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그가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조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효율성과 편리함을 위해 생산되었던 기계가 오히려 사람을 조종하고 다시 생성해내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조종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기억도 함께. 이사카의 이 작품에서는 기계에서 조금 더 진화되어 형체는 갖지 않았으나 그 어떤 기계보다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이 뛰어난 '정보' 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실이 아닌 것도 진실로 만들어버리고, 쉽게 왜곡되어 사람들의 두 눈을 순식간에 가릴 수 있는 인터넷과 정보는 수십 개의 팔을 가진 괴물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등장인물들의 삶을 위협했다.
 
'용기는 친정에 두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와타나베. 첫 등장부터 심상치가 않다. 남편의 바람을 의심하는 아내 가요코에 의해 고문을 의뢰받은 오카모토 다케루에 의해 손톱이 뽑힐 처지에 당해 있는 것이다. 다행히 손톱은 뽑히지 않았지만 선배 고탄다가 맡았던 일을 끝내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바람에 후배 오이시와 파견을 나가는데, 고탄다가 어떤 일에 휘말렸음을 알게 된다. 하리마자키 중학교, 안도상회, 개별상담을 검색하면 누군가가 '일'을 하기 위해 검색한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오이시는 치한으로 몰리고, 상사 가토는 자살을 하며, 와타나베를 고문하려 했던 오카모토 역시 끔찍한 짓을 당하고 불쾌했지만 소중했던 친구 이사카 코타로 또한 칼에 찔렸다. 자신들의 뒤를 쫓는 자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으나 진상을 파악하지는 못한 와타나베와 오이시, 고탄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아내 가요코가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숨가쁘게 달린다.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정보'가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날조된 정보는 무섭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믿지 말아야 하는가조차 판단할 수 없다. 왜곡된 정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려고 하면 시스템이, 사회가 압박해온다. 한 사람의 만화가를 도시에서 쫓아내버리기도 하고, 순진한 남자를 순식간에 치한으로 몰아가며 누군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몰고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반화되고 정형화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예외였으니까. 예외는 사회를 위협하는 바이러스같은 존재가 되어 정형화와 일반화를 흐트러뜨린다. 그런 사회로 수용되지 못하면 사라져야 하는 것, 그것이 규칙이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양심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정보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느냐,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믿으면 믿을수록 진실은 사라지고 거짓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그런 시스템 안에서 와타나베와 고탄다, 오이시와 가요코는 큰 목적을 위해 정보를 악용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눈 앞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선택으로 연결되는지도 모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회사 고슈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할까. 물론 그들도 한 때는 고슈의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기심을 느끼고 용기를 내고 뭔가 해보겠다고 뛰어들었다는 점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그런 그들이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손에서 생동감을 가진 존재로 활기차게 움직인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성이 넘친다. 가장 평범한 듯 하면서도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와타나베와 백치미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결단력도 있고 어쩌면 가장 현명한 인물인지도 모를 아내 가요코, 순수해서 많이 상처받으나 용기를 낸 순간 그만큼 당당해지는 오이시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련미를 선보이는 선배 고탄다, 그리고 과묵함과 쿨함으로 무장한 오카모토와 호색남인 친구 이사카 코타로까지. 사실 더 많지만 어디까지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하나하나 완전히 다른 등장인물들의 매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분위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내 [골든슬럼버] 가 떠올랐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 '과연' 했다. [골든슬럼버] 가 정보와 관련된 사건을 묵직하고 안타깝게 그리고 있다면 [모던타임스] 는 그보다는 코믹하게, 그러나 소재의 심각성을 잃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골든슬럼버] 와 [모던타임스] 를 비교하면서 읽는다면 그 재미가 배가 될 것 같다.
 
우리는 어느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부품일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릴 수 있는 혜안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숨통을 조일 수도, 양심없는 누군가를 웃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영화 <모던타임스>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조이던 찰리 채플린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 그건 나도 이해해. 하지만 있지, 생각이야 바꾸면 그뿐이잖아. 일이라서 했어도 나쁜 짓을 했으면 죗값을 치를 순간이 와. 아니 솔직히, 누굴 상처 입혔으면 자신도 상처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이라서 괴로운 일을 해야 한다면,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면 해야지...응, 고민하고 끙끙 앓은 다음 그래도 일이니까 한다. 그런 거라면 이해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상처 입히고 소란을 피우는 건 안 돼. -p584 (가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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