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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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지금의 솔직한 내 마음이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의 결말은 늘 그런 것이었다. '예쁜' 공주나 아가씨가 '잘생기고 멋진' 왕자님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영원한 행복을 누렸다는 이야기. 사랑도, 결혼도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처음 동화를 읽은 나이부터 20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부터 깨달았던 듯 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이 책 역시, 못생긴 한 여자가 있었는데 어떤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했어, 그런데 그 둘에게 시련이 닥친 거야, 그러다 그 시련을 이겨내고 둘이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대-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책이었다면 더 좋았을 뻔 했다. 못생긴 여자와 그렇지 않은 한 남자의 사랑이 나를 이렇게 울릴 줄 알았다면, 가슴을 이렇게 먹먹하게 할 줄 알았다면 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을 조금 더 미뤘을지도 모른다.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실은 대부분의 여자들...그러니까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거나...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아니, 남자든 여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極)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p185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그렇다. 일단은 이것은 사랑 이야기다. 상처를 가진 남자와 또 다른 상처를 가진,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못생긴 여자의. 예쁜 것만 추구하고 그 외의 가치를 무참히 밟아버리는 사회를 비판하는 사회소설이든, 인생에 대해, 삶에 대해 논하는 철학소설이든 난 일단은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어쨌든 등장인물들은 사랑을 통해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사는 게 대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는 작가가 말한,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힌다는 그 사랑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여전히 '희망'이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를 간호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길고 긴 골목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골목...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모든 인간은 투병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p214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그와 그녀, 그리고 요한은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이다. 부모의 사랑, 부모의 이기심, 내재된 자신들의 어둠을 끌어안고 장난처럼, 무심하게, 그러나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그 중 그와 그녀가 사랑을 했다. 함께 음악을 듣고, 함께 거리를 거닐며, 연인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자리잡은 어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도 못생긴 그녀가 품었던, 그러나 종류는 다른 어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피곤하고 미워하게 될, 원망하고 후회하게 될 일상 속으로 차마 그를 끌어들이지 못했던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안다. 그 사랑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절대적인 것이어서 더욱 그리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느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사랑 뿐만은 아니다. 하하호호, 그저 못생긴 그녀와 평범한 그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유쾌한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살짝 기대에 어긋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이 결국은 좋은 것,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굳어진 사회를 작가는 꼬집는다. 아름다움이 좋은 것이 되어버린 것은 그것을 부러워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도 적용되지만 단 하나, 사랑에 있어서만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사람의 상처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수학 공식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지층의 구조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좋았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재치있고 유쾌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 책은 다소, 무겁다. 글을 읽는 속도 자체가 한 템포 느려진다. 삶과 사랑에 대해 논하는 작가의 생각들이 책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성이 독특하다. 앞 문단에도 뒷 문단에도 해당되는 듯한 마지막 글귀들을 음미하다보면 어느 새 시간이 훌쩍 흐른다. 숨을 '헉' 몰아쉬게 하는, 뭐가 서러운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한 바탕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게 만드는 결말은 일품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파반느 또한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호해지는 결말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둘. 그 중 하나, 요한. 나는 '그'보다는 요한에게 더 눈이 갔다는 것만 말해두자. 그에 대해서는 누군가 이야기할 사람이 있으려니. 그리고 둘. 사랑 이외에 언급하고 싶었던, 그 외의 모든 것들. 그것들도 누군가가 이야기해 주겠거니. 나는 그냥 조금 더, 사람이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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