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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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세계문학'이라는 언덕을 올라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중고등학생 때 접한 [제인에어] 나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등의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를 읽고 나서는 기겁(?)하며 세계문학에서 손을 뗐던 것 같다. 그 때 받은 '세계문학'에 대한 인상은 '심오한 것, 어려운 것, 이해하기 힘든 것'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더 욕심이 나서 서점에 갈 때마다 세계문학전집이 꽂혀 있는 코너를 맴돌기만 했었는데, 이상하게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이언 매큐언이 수상하기도 했다는 서머싯 몸 상의 주인공, 바로 그 '서머싯 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느낌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재.미.있.다' 로 표현할 수 있겠다. 총 516 페이지에 달하는, 결코 얇지 않은 책임에도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결말이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개성이 뚜렷한 인물이 여럿 등장함에도 어색하거나 혼란스럽지 않고,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기교 또한 대단해서 마치 흘러가는 물에 몸을 맡긴 듯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작품 안에 녹아드는 듯한 느낌이 꽤 괜찮다. 

이 작품은 작가인 서머싯 몸이 화자로 등장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을 취한다. 일리노이 주에서 평범하게 자란 청년 래리는 1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이고 깨달음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 답을 찾아 약혼녀인 이사벨과 파혼하고 프랑스의 탄광과 수도원, 독일의 농장, 스페인과 이탈리아, 인도로 이어지는 긴 여행을 떠난 래리. 그런 그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방법을 선택한 이사벨과 그녀의 남편 그레이, 세상이 준 시련으로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내몬 소피, 고된 한 때를 보냈지만 행복을 붙잡은 수잔과 일생을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보낸 엘리엇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작가인 몸 선생님을 통해 전달된다. 

래리가 전쟁을 통해 품게 된 의문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한 번씩은 생각해 봤음직한 것들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세상에 악은 존재하는가, 불멸의 영혼은 있는가. 어떤 사람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래리처럼 일생을 바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이사벨처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라 여기며 생활에 집중할 것이다. 누구도 밝히지 못한 해답을 찾아 공부하고 싶다는 래리의 마음도, 상류사회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사벨의 마음도 모두 이해된다. 또한 파티와 사교계의 생활을 삶의 가치로 삼은 엘리엇이나 안정된 직장을 원하는 그레이 등의 삶의 방식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의 생활방식이 옳고 누구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는 평가가 아니라, 그 누구의 삶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으며 각자의 몫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닐까. 작가가 이 작품을 왜 '면도날'이라고 붙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책의 맨 앞장에 적힌 구원에 관한 글을 보면 어떤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고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이든 자신만의 '구원'을 얻기란 매우 힘든 과정이란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참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진리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해 논하는 철학서 같기도 하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내보여주는 단순한 이야기같기도 하다가, 여러 사람을 등장시킨 새로운 형식의 자서전 같기도 한 이야기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이 붙은만큼 구성이나 이야기의 전개 등이 깔끔하고 내용에 대한 흥미가 높다는 점이다. 이 책을 계기로 '서머싯 몸'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 그리고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도가 쭉 올라갔다. 어쩌면 지금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를 읽는다면 어렸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재미를 발견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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