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는 내내 '읽기 싫다, 그냥 책장에 꽂아두고 싶다' 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리 TV 라고 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고통, 슬픔, 위험 등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 혼자 있을 때 극한 상황이 벌어지면 얼른 채널을 돌려버리거나 TV를 아예 꺼버리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볼 때는 내 방이든 화장실이든 화면이 보이지 않는 곳,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 도망쳐버린다. 가족들은 왜 그렇게 유난이냐고 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또 시작이구나' 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으로 참아주는데, 어째, 마음이 견디지 못하겠는 걸. 주인공이 궁지에 몰린 TV 드라마를 볼 때처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도망치고 싶었다. 

인터넷에 이 작품이 연재되기 시작했을 때는 일부러 미뤄두었다.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는 글들에 감칠맛이 나서 '에이,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집중해서 봐야지' 했었다. 하지만 그 때 그 감칠맛을 조금 참고 인터넷으로 이 이야기를 접했다면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을 조금은 쉽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무진을 가득 채우던 안개처럼 진실이 왜곡되고 숨겨지는 막막한 이 세상을, 얼마나 많은 힘없는 사람들이 오늘도 살아내고 있을지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작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그들은 강한 자와 약한 자로 구분된다. 혹은 늘 군림하는 자와 늘 짓밟히는 자. 그 두 분류의 사람들 사이에 서유진이 서 있다. 어쩌면 그 사람도 약한 자와 늘 짓밟히는 자들 사이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성질은 약간 다르다. 그는 그냥 짓밟히려 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많은 창과 칼을 만나도 그 속을 뚫고 전진하며, 하나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뿌연 안개 속을 더듬고 더듬어 결국에는 한 줄기 빛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 앞에는 비록 상처받아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아이들이 함께한다 . 

작가는 '이상한 일은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서유진이 연두와 유리가 증언한 동영상과 진술서를 들고 교육청 장학관을 찾아간 장면은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서웠고 그 어떤 코믹영화보다 우스웠다. 가여운 아이들을 방치한 채 자신만의 이익을 생각하는 장학관이 '원하는 대로 이루리라. 소망하는 대로 가지리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주님은 모두 주신다' 라고 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은 종교와 세상에 대한 나의 믿음을 부질없는 것으로 만드는 듯 했다. 또 진실을 알면서도 떨고 있는 아이들을 공격하는 가해자 측 변호사나 가해자들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신도들이 나는 참 무서웠다. 답답했다. 말 그대로 사람에게 정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작가는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은 정나미가 떨어지는 그만큼 인간에 대한 경외같은 것이 내 안에서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라고도 했다. 때로는 그것이 도저히 사람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 사람에게 실망하게 만드는 구성원과 그럼에도 ''사람'을,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구성원을 모두 투입시켰다. 무진에 안개가 자욱하듯 우리 사는 세상 또한 안개가 걷히지 않지만, 그래서 답답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빛은 어딘가에 늘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을 뿐 진실이 진실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용기를 낸다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용기내서 무엇을 한다는 것보다 '용기를 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경이롭고 훌륭한 일인지 서유진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이 책이 자꾸 더 불편해지나 보다. 나는 용기없음을 절실히 느껴야 하니까. 평범하고 작은 내가 만약 나의 용기를 원하고 비겁을 원하지 않는 일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을지 수십 번 자문해야 하니까. 그 때 나도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에요' 라고 형형한 눈빛으로 대답하고 싶으니까. 

신문기사 한 줄을 읽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에게 그 동안 참 고생 많았다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위로해주고 싶다. 배우가 작품을 끝내고 쉬이 다른 작품을 시작하지 못 하듯이, 히스 레저가 자살한 후 <다크나이트>의 조커 역할의 영향이 컸다는 말이 나돌았던 것처럼, 더러운 오물 속과 상처받고 힘든 사람들 속을 몇 백번은 드나들어야 했을 그녀 공지영에게도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비 내리는 깊은 밤, 나를 분노의 도가니, 슬픔의 도가니, 희망의 도가니로 빠트렸던 작품 [도가니].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 계속 기억하는 것. 어두웠지만 그래도 그 어둠 속에서 희망의 뿌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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