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호~오랜만에 엄청난 작품을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여간해서는 스릴러에  별 다섯 개를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줄 수만 있다면 많은 별을 주고 싶을 정도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 띠지의 광고문구에 '흥!'하고 콧방귀를 거세게 뀌기는 했다. 스티븐 킹과 히가시노 게이고 팬이 열광한 경이적인 걸작이라는 둥, 영미권 최고의 소설상인 맨 부커상에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둥, 신뢰해 마지 않는 일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해외부문 1위라는 둥, 이런이런, 듣기만 해도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동안 띠지 문구에 속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닌 관계로 50% 정도만 믿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와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마음을 콱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 책 때문에 그 잠 많던 제가 밤잠을 포기했다구요! 

1933년 하얀 설원에서 고양이를 사냥하는 두 형제. 동생을 먼저 보내고 남아있는 형을 공격하는 한 남자. 1953년, 스탈린 치하의 소련. 교육, 의료, 안전 등 모든 것을 제공하는 대신 과다한 노동과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당하는 시대. 국가 안보부 요원 레오 데미도프는 그런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 불온사상 유포, 명령불복종, 반대세력 결성 등 국가를 위협하는 모든 범죄를 제압하고 범죄자들을 색출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한 번 균열이 생기면 멈출 수 없는 법. 어느날 체포했던 남자가 범죄자가 아니라 단순한 수의사에 불과했다는 진실을 깨달으며 레오의 마음 속에는 충성에 대한 의심이 싹트고, 동료의 살해당한 아들을 단순사고로 처리한 데 대한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의 심적변화를 눈치챈 동료에 의해 강등되어 다른 도시로 전출된 그는, 예전의 모든 것을 버리고 공식적으로 범죄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소련에서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노동자의 천국이라 불리며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국가에 대한 의심이나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소련의 모습은 주인공 레오가 근무하는 MGB본부인 루비안카와 같다. 신분증이 발급된 사람 이외에는 언제 어떻게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루비안카. 그 곳은 다른 생각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소련 그 자체이며 결코 열리지 않을 닫힌 문이다. 

조심스럽고 불안하게, 언제 어디서 잡혀갈지 모를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며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는 레오가 심적변화를 일으키는 부분은 그래서 더 극적이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를테면 영웅의 탄생을 기원하는 마음이랄까. 그것은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던 존 프레스톤(그는 약으로 인해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이 처음으로 약을 버리며 체제에 반항하던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과 같았던 듯 하다. 정말 영화를 보는 것처럼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기분이 매우 만족스럽다. 

1930년대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되고 구 소련의 실제 연쇄 살인범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은 살인범을 추적해가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소련의 공포정치 아래에서 건조하게 맺어졌던 레오와 그의 아내 라이사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크다. 사랑조차 생각해야 알 수 있고, 권력에 대한 공포로 청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관계가 온갖 모험을 겪으면서 진정한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해가는 모습은 마치 사건이 해결된 뒤 변화가 일어날 소련의 모습을 예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에 그들을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과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 등 긴장과 재미를 조성하는 모든 요소가 알맞게 버무려져 있다. 

책을 읽어나가면 작품의 제목인 [차일드 44]가 무슨 뜻인지 곧 깨닫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부르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는 이 작품이 계속 눈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느낌은 눈이 가진 포근함이 아니라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차가움과 슬픔, 날카로움이었다.  범인에 대해서도 연민을 품을 수밖에 없게 하는 외로움. 온갖 감정을 느끼게 하고 말 그대로 손에서 절대 뗄 수 없게 만든 이 작품, 영화도 기대된다. <이퀼리브리엄>에서 주연을 맡았던 크리스찬 베일이 레오 역을 연기한다면 은근 잘 어울릴 듯도 한데. 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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