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로시티 - 딘 쿤츠 장편소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8
딘 R. 쿤츠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딘 쿤츠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오드 토머스 시리즈와 [벨로시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비교해보면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 우선 남자주인공은 음식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한다는 것. 오드 토머스는 식당에서 일하고 [벨로시티]의 주인공 빌리는 술집에서 일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여자들은 이미 다른 세계에 가 있다는 것도 공통점. 약간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오드 토머스에게는 죽음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빌리는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라는 것 뿐일까. 하지만 오드 토머스 시리즈든 [벨로시티]에서든 슬픔 가운데 느껴지는 무덤덤함과 서정성은 변함이 없다. 
 
세상에서 잔혹하다고 일컬어지는 일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원만하게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일이 어긋나 버리거나 더 심하게는 미래를 송두리째 빼앗겨버리는 것. 생각만으로도 안타깝고 아찔하지만 어쩌면 이런 일은 예상보다 쉽게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었던 연쇄살인범도 누군가의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빼앗았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 누군가의 미래가 자신 때문에 변할 수도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벨로시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가진 평범해보이는 남자 빌리가 연쇄살인범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쪽지를 받고 공포의 시간을 보내다 결국은 범인을 스스로의 손으로 응징한다는 것. 하지만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줄거리만큼 간단하지 않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주인공 빌리 뿐만 아니라 읽는 이의 숨통마저 조여오고 과연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게 만든다. 쪽지를 경찰에게 가져가면 할머니를 죽이고 전달하지 않으면 금발의 여선생을 죽이겠다니, 터무니없지만 사람을 너무나 간단하게 공포의 구덩이로 밀어넣는 설정이다.
 
만약 빌리에게 지킬 것이 없었다면 빌리는 범인과의 게임을 간단히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나서지 말고, 조용히 하고, 단순화하고,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고, 자신이 가진 것을 즐겨라-가 삶의 철학인 빌리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여자 바바라가 있다. 범인과의 혈투와는 별개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 빌리의 싸움은 자신이 아닌 바바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혼수상태인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책을 읽는 빌리의 마지막 모습은 뭐랄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눈이 많이 내리는 오두막 안의 따뜻한 불빛이 비치는 것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딘 쿤츠의 작품은 잔혹한 이야기를 다루기는 하지만 이렇게 군데군데 엿보이는 따뜻한 시선이나 언뜻언뜻 내비치는 유머가 좋다.
 
내가 영어에 관심이 있었다면 '벨로시티'가 '속도'를 뜻한다는 것을 더 일찍 깨달았을텐데. 책을 읽는 내내 '대체 벨로시티는 어떤 도시야,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라며 투덜댔었다. 에혀. 제목 그대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이야기다. 숨통을 조여오는 정신적인 압박과 신체에 가해지는 육체적인 고통까지 마치 링 위에서 정신없이 얻어터지는 권투선수를 바라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욱 마지막에 다가오는 여운이 더 깊게 가슴을 파고드는 작품이었다. 간혹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아쉽기는 했지만 중간중간에 빌리의 독백으로 T.S. 엘리엇의 작품 구절을 인용한 점은 돋보인다.
 
<평범한 남자 3부작>. 이미 출간된 [남편]과 앞으로 출간될 [The Good Guy]에서의 평범한 남자들은 어떤 시련을 맞이하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그 무엇보다 '평범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하는 스릴러다.
 
일어날 일은 언젠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더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기적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시간은 영원히 끝이 없는 법이다.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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