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김선우 외 지음, 클로이 그림 / 비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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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p50 <즐거운 편지>, 황동규  

시는 시험에나 나오는 시험범위의 하나로만 여겨졌던 중학교 시절, 나에게도 마음을 울리던 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중학교 3학년 친구들과 함께 보러 간 영화 <편지>에 등장한 이 시를 한동안 잊을 수가 없어서 시집을 뒤적거렸었다. 그리고 무슨 마음에선지 예쁘게 필사를 해서 다이어리에 고이 남겨뒀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때의 나는 어렸었지만, 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지만 영화가 남겨준 감동 덕분에 오래도록 그 시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는 나에게 무척 어렵다.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작가의 마음과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작품에 대해 이리저리 해석을 하지만 그 소설이, 시가 어떤 의미로 쓰여진 것인지 작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모든 시들이 강렬한 느낌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은 아니므로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이 어떤 시를 선별해서 읽는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때문에 여러 작가들의 시가 함께 들어있는 모음집은 참 반갑다. 게다가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인 사랑시라니, 이번만큼은 시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시에 대해 도전하는 마음을 갖다니 참 어리석다라며 스스로도 자책하며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그만 시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랑에 대한 시이다 보니 언어들이 말랑말랑하다. 읽으면 느낌이 확 오는 시들도 꽤 된다. 하지만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장석남 시인과 김선우 시인의 해설이다. 예전에는 시 뿐만 아니라 해설들도 어려워서 시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분들의 해설은 또 다른 문학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에 마음이 젖고, 해설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은 성미정 시인의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사랑으로 상대가 아닌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모습이 시와 해설에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시와 해설을 돋보이게 해주는 삽화 또한 멋지다. 시의 주제와 분위기에 맞도록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그려넣어진 삽화들은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클로이라는 사람. 앞으로 삽화가 들어간 책을 살필 때에는 꼭 찾아봐야겠다.

여전히 시는 내게 어렵고 소설을 읽을 때처럼 느낌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시 모음집으로 조금씩 시에 다가가다보면 언젠가 시가 진정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되지 않을까. 시는 어른이 읽는거야 라는 핑계를 대며 시집을 멀리했던 학창시절. 이제는 시집에 눈과 손이 자꾸 닿는 것이 이미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 덕분에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시들이, 좋아질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p34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성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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