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가고일은 고딕 성당의 외벽을 장식하는 괴물형태의 물받이 조각상을 말한다 (가고일 2 P343)- 처음에는 가고일이 뭔가 싶었다. 좋아하는 보라색이 들어간 매혹적인 표지 탓에 '가고일'도 분명 로맨틱하고 깊이가 있는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고일이라고 크게 쓰여진 제목 위에 '불멸의 사랑'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으니까. 작가는 친절하지 않게도 독자들에게 가고일이 무엇이라고 콕 집어 내보이지 않는다. 그저 책을 읽어나가면서, 혹은 옮긴이의 말을 통해 그제서야 '아, 그거! '라고 떠올릴 뿐이다. 어쨌든 가고일은 이상한 날개를 달고 건물 기둥의 한 켠을 붙잡고 있는 듯한 괴상한 모습을 한 석상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주인공은 가고일만큼이나 흉측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전직 포르노 배우인 그는 술에 취해 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고 전신이 불에 탔다. 여러 여자를 애닳게 했던 아름다운 외모도 불과 함께 사라졌다. 오랫동안 혼수상태로 지냈고 몇 번의 수술을 거쳤으며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을 경험해야하는 그 앞에 마리안네 엥겔이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그에게 700년 동안 계속되어온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화살로 시작되었고 화살로 끝을 맺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사랑을.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라고 하는 띠지의 문구를 100%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불멸의 사랑이라고 해도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고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종국에는 처음과 같은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원하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진부하다고 치부해버리는 '사랑'이야기에 완벽히 빠져들 수는 없을 거라 짐작했는데, 나는 책을 집어들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두 권을 내리 읽어버렸다. 

이 책의 매력은 마리안네와 그의 사랑 외에도 마리안네가 들려주는 네 가지 사랑 이야기에 있다. 병에 걸린 아내를 따라 죽음을 선택한 대장장이, 혼자 바다에 나갔다가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폭압적인 다이묘에 의해 사랑을 강탈당하고 비구니로 살다 끝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생매장당한 여인, 허락받지 못할 사랑을 했으나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한 남자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마리안네의 입을 통해 현실 속에 재현된다. 

마리안네가 들려준 이야기 속의 사랑들은 단 한 편도 '누구와 누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고 끝나지 않는다. 모두 자신의 사랑을 위해 희생할 뿐 영원한 행복을 약속받지 못했다. 어쩌면 그 네 가지의 이야기가 마리안네와 그의 사랑의 결말을 암시해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랑이 과연 비극인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일생동안 혹은 죽어서까지 그 사랑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인생은, 마리안네와 그의 삶은 힘들었으나 아름다웠던 것이 아닐까. 

그들이 처음 만나 700년이 지난 지금의 마리안네의 직업은 조각가다. 아무 특징없는 돌 속에서,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돌 속에서 새로운 존재를 창조해낸다. 수많은 가고일들을.  그 가고일들이 마리안네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그는 사고와 화상이라는 과정을 통해 가고일이 되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사랑을 오직 오락으로만 여겼던 그 앞에, 사고와 화상은 생명을, 마리안네라는 단 하나의 사랑을 데려다 주었다. 비록 7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으나 그 시간의 깊이만큼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이리저리 돌고돌아온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안타깝고 아련했으나 무척 재미있었다. 기대 이상이었기에 아주 만족한다. 단테의 [신곡] 을 도입한 글의 전개도 멋있었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그들의 사랑이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만 같다. 고통과 희생, 구원을 통해 피어난 그들의 사랑 덕분에 마음이 촉촉해져 온다.

 



 이것은 화살이 내 가슴에 들어온 세 번째 사건이 될 터이다. 첫 번째는 나를 마리안네 엥겔에게 데려다 주었다. 두 번째는 우리를 갈라놓았다.

 세 번째는 우리를 재결합할 것이다. (가고일 2 p339)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계속된다. -아이 러브 유, 아이시테루, 에고 아모 테, 티 아모, 예흐 엘스카 시흐, 이히 리베 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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