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여자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예전 어떤 드라마에서 호스피스 일을 하는 사람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읽어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책을 읽어주는 행위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 그 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남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일단 사람들은 책을 '듣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읽어주는 사람은 상대방의 기호에 맞추어야 하며, 목소리나 상황이 책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을 경우에는 책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 나도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책을 읽어준 적은 없으니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이긴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주위사람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달하는 것처럼, 책 속에서 의미있고 좋다고 생각한 부분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책을 읽는 순간순간 솟아오른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준다면 그런 마음에서 시작될 것 같다. [책을 읽어주는 여자]의 마리-콩스탕스 G처럼 목소리가 뛰어나게 좋은 편은 아니니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남편은 있으나 아이는 없는 마리는 서른네 살로, 순전히 목소리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책 읽어주는 일을 시작했다. 아파트에 '소리 잘 나는 방'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놓고 목소리의 울림과 듣기를 즐기는 그녀의 바람대로 신문에 광고를 낸지 얼마 후부터 고객이 생겼다. 그런데 단순히 책만 읽어주고 오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일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방향이 조금씩 궤도를 바꿔간다. 한창 사춘기를 맞고 있는 장애를 가진 소년 에릭과 마르크스에 심취한 노 백작부인, 책이 아닌 마리에게 관심이 많은 사업가와 집보다는 아직은 밖에서 놀고 싶어하는 어린 소녀, 게다가 사드 백작의 책을 읽어달라는 판사까지. 마리의 좌충우돌 책을 통한 소통의 확장은 시작된다. 

이 책 안에는 다른 여러 종류의 책들이 많이 등장한다. 모파상의 [손]이라는 작품부터 노 백작부인이 읽어주기를 청하는 [자본론], [독일 이데올로기] 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드 백작의 책까지 책을 통해 책을 들여다보는 즐거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단순히 '책'이 아니다. 그 중에는 마리가 직접 선정한 책도 있지만 대부분은 고객으로부터 의뢰받은 책들로, 각각의 고객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떤 지식을 얻고 재미를 얻기 위해 읽었던 '목적'으로서의 책이, 한 개인의 특성을 나타내고 서로가 소통하기 위한 '도구'로변화한 것이다. 

독서는 보통 홀로 이루어진다. 혼자 구절들을 음미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공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독서를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기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책이 한 권씩 있다면 서로의 책을 나눠 읽어주는 것도 멋진 작업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문체가 무척 독특하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리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양 덤덤하고 감정의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한 편의 흑백무성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어쩐지 신비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는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상황이나 문체와 연결되어 더욱 흥미를 자극한다. 

작품의 맨 뒤편에는 레몽 장과 역자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레몽 장을 처음 접한 나같은 독자와 프랑스 문학의 동향이 궁금한 이에게는 고마운 부록이 아닐 수 없다. 홀로 즐기기 위한 독서가 아닌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한 독서,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독서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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