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의 지도
에밀리오 칼데론 지음, 김수진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스파이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읽는 내내 가슴을 졸여야 하지만 흥미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정보를 캐내 아군에게 넘겨야 하는 스파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혼란 속에서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운명의 상대’라는 요소까지 첨가되면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이야기야말로 최고의 낭만을 선사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죽음과 피바람이 항상 따라다니지만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위해 움직이는 스파이는 악당이라는 이미지보다는 멋진 사람의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통속적이라 할 수 있을 스파이 이야기지만 이 작품은 여타의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우리가 영화로 만나왔던 제임스 본드나 영웅들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책을 접한다면 약간 당황할 것이다. 배경은제2차 세계대전, 장소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로마. 혼란스러운 시대 속을 살아가는 스파이의 이야기지만, 책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진정한 스파이인지 되묻게 되는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소설이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로마로 피신해 있던 건축가 호세 마리아는 기거하던 아카데미에서 몬세라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의 매력에 빠져든다. 어느 날 아카데미에 있던 도서관의 고서들을 팔아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외출한 그와 몬세는 한 권의 책을 계기로 후니오 대공과 접촉하게 된다. 그 책은 신이 직접 작성하고, 세계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담겨 있다는 ‘창조주의 지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책으로, 나치는 그 지도를 비롯한 12개의 성물을 차지하여 강한 힘을 얻으려 하고 바티칸은 그러한 나치를 막으려고 한다. 그 지도 때문에 스미스라는 남자에게 후니오 대공으로부터 정보를 캐내라는 의뢰를 받은 호세 마리아는 얼떨결에 스파이 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그와 몬세, 후니오 대공의 앞날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영토분쟁과 독일 히틀러의 야욕, 일본의 세계재패 야심 등 이 작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얼마 전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책을 한 권 읽기는 했지만 짧은 시간 내에 그 많은 정보를 정립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머리는 그리 뛰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책이 전쟁을 정치, 경제, 산업등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면 [창조주의 지도]는 로마를 배경으로 한 팩션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눈, 그것도 스파이의 눈으로 자세한 정황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걸고 스파이 활동을 감내해야 했던 호세 마리아와 몬세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후니오. 그들보다 더 강하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 몬세였다. 몬세는 이 작품에서 이상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굳건한 인물로 두 남자보다도 더 강직하게 그려진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비밀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런 몬세야말로 스파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은 몇 번 접했지만 로마와 스페인 내전을 연관지어 다룬 작품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전 세계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바티칸 시국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것은 새롭고 괜찮은 시도였던 듯하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다른 팩션들과는 달리 예수와 성배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가 허무하게 끝내버리지 않은 점 또한 마음에 든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과 복잡한 플롯, 부족한 역사적 지식으로 읽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와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새 푹 빠져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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