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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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달라이라마의 나라, 신비하고 성스러운 나라. 티베트 사태가 일어나기 전, 내가 가지고 있던 티베트에 대한 이미지다. 그 전까지만 해도 티베트는 내가 가고 싶어하는 여행지 중 하나였으며, '티베트'라는 단어를 발음하기만 해도 어쩐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약간의 당혹감마저 느꼈었다. 티베트사태가 보도되자, 나는 그곳의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이 더럽혀진 것 같아 아쉬웠고 그들의 절박한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그러나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던 '티베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많은 여행서적을 보며 그들의 진짜 모습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 

이 작품은 내가 알지 못하는 티베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 권위 '마오둔 문학상'을 수상하고 중국 본토까지 열광시킨 티베트 작가의 티베트 이야기. 아라이의 장편소설인 이 작품의 원제는 [진애낙정-먼지는 결국 아래로 떨어진다]이다. 권력을 하나의 먼지로 비유하여 비록 중국이 하사한 명칭이지만 '투스'라는 제도가 티베트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잔잔하면서도 때로는 아련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바보'는 마이치 투스의 둘째 아들이다. 만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임신시켜 '바보'가 나왔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머니만 제외하고 그가 바보라는 사실을 좋아한다.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거나 전쟁을 두려워해야 하는 걱정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그들은 바보가 보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 그는 바보이지만 귀중한 '뼈대'를 타고 났다. 태양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투스의 아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평온한 티베트에 양귀비 씨앗이 들어오면서 변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양귀비 씨앗을 둘러싼 전쟁, 재산의 축척, 중국에서 일어나는 빨간 한족과 하얀 한족의 싸움은 세상이 흔들리는만큼 티베트도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바보'는 독특한 인물이다. 평소에는 정말 바보처럼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기 일쑤지만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 다른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마치 몸에 신이 내려온 것처럼 별안간 소리를 질러 알려준다. 그런데 평소에 그가 하던 말이 과연 바보스러운 것이었을까. 그것은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모두 다르듯, 그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었을 뿐이다. 다만, 투스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좇는 것을 그만 좇고 있지 않다는 현실이 주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바보'는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행운이 따르는 인물이었지만 변화하는 세상은 그에게 무릎 꿇기를 강요한다.

작품에는 많은 색이 등장한다. 양귀비 씨앗이 자라 열린 열매에서 나오는 하얀 액, 중국에서 일어난 하얀 한족과 빨간 한족의 싸움, 하얀 겨울을 상징하는 순결한 백색,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흘렸을 피의 붉은색.  '바보'가 물든 것은 어떤 색이었을까. '바보'는, 그리고 티베트는 '변화'라는 색에 물들었다.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풍습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생활 속에 온갖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투스'라는 이름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힘없이 무너진다. '변화'를 딱히 한 가지 색으로 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가장 강력하고 유혹당할 수밖에 없는 색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티베트에 역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가 아닌 티베트의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는 충분하다. 밋밋하지만 천연덕스러운 바보의 말투 속에서 티베트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작가 아라이의 티베트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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