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 세계에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판단할 능력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수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신문, 뉴스, 잡지, 그리고 인터넷. 범람하는 정보만큼 '진실'의 숫자도 가늠할 수 없을만큼 증가한다. 그 '진실'이 과연 '진실'인가.  확실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유통되는 정보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 '나머지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유통되었던 정보를 어리석을만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누가 나를, 이 나라 사람들을 정보를 통해 감쪽같이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 해볼까 말까였다.
 
아오야기 마사하루 또한 그랬다. 치한을 증오하는 아버지와 상냥한 어머니가 있고, 물건을 배달하는 성실한 택배청년이었던 그에게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센다이에서 총리 가네다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을 무렵, 그는 친구 모리타 신고를 8년만에 만나고 있었다. 모리타는 아오야기에게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너 오즈월드가 될거야'라며 어서 도망치라고 한다. 뜻모를 소리에 어리둥절해 있던 아오야기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경찰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얼떨결에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전국민의 표적이 된다. 하지도 않은 일의 범인이 되어 도망치는 그의 뒤를, 산탄총을 쏘는 경찰과 아오야기가 나타나지도 않았던 장소에서 그를 보았다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시민들이 뒤쫓기 시작한다. 센다이의 모든 시민들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시큐리티 포드에 의해 아오야기의 동태가 낱낱이 파악되고 그가 숨을 곳은, 안타깝지만 없다.
 
책을 읽으면서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은 '공포'다. 귀신이 등장하거나 피가 넘쳐 흐르는 엽기적인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느낀 것은 확실히 공포 그 자체였다.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가 단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당사자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이 얼마나 많은 오보와 오판에 의해 진실이 되어버리는지에 대한 공포. 곳곳에서 입수된 아오야기의 영상을 보면서 뚱한 표정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어두운 구석이 있다느니 하며 성급하게 단정해버리는 아나운서의 말은 하나의 정보가 되어 '~라고 했대'에서 '~래'라는 포장된 '진실'이 되어버린다.
 
아오야기 사건에서 '방송'과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시큐리티 포드는 범죄를 조장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범죄는 총리를 살해한 진짜 살인범을 찾지 않고, 아오야기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자들은 아오야기의 고향집까지 찾아가서 그의 부모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민다.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려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아버님'을 부르짖으며 한 마디 해주기를 외치는 기자들의 모습은 현실 속 기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기자들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사실도 아닌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으며 매달려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이사카 코타로는 아오야기의 아버지의 입을 빌어 비판한다. -이름도 못밝히는 너희 정의의 사도들, 정말로 마사하루가 범인이라고 믿는다면 걸어봐. 돈이 아니야, 뭐든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걸라고. 너희는 지금 그만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생을 기세만으로 뭉개버릴 작정 아니야? 잘 들어, 이게 네놈들 일이란 건 인정하지. 일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자신의 일이 남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면 그만한 각오는 있어야지. 버스 기사도, 빌딩 건축가도, 요리사도 말이야, 다들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가며 한다고. 왜냐하면 남의 인생이 걸려 있으니까. 각오를 하란 말이다(p450)-
 
아오야기의 도망은 그의 추억과, 그의 지인들의 추억이 얽히고 얽혀 더욱 애처롭게 느껴진다. 평범하고 즐거웠던 대학시절,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연인과의 이별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평범하고 소중한 시간들.  그 시간들의 파편이 아오야기가 도망치는 곳곳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더욱 작품을 읽는 사람의 가슴을 친다.
 
이 작품은 생생한 추격신과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최고의 재미와 가슴 절절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툭툭 내뱉는 말들은 이 작품이 단순히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치밀한 복선, 퍼즐식 구성, 투명한 감성, 철학적인 대화까지>로 뒷표지를 장식한 이 문구는 거짓이 아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분명히 이렇게 이 작품을 잘 나타낸 문구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러나 나는 마치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겪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지금도 어디선가 왜곡된 정보로 누명을 쓰거나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를 과연 내가 어디까지 믿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마음이 먹먹해져 온다.



 

추억이란 건 대부분 비슷한 계기로 부활하는 거야. 내가 떠올리고 있으면 상대도 떠올리고 있지-p210

 

깜짝 놀랄 만큼 하늘이 파랄 때면, 이 땅이 쭈욱 이어진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든가, 사람이 죽고,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다 거짓말 같아요.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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