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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을 입은 여인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박노출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자그마치 2박3일이나 되는 여정이 드디어 끝이 났다. 책 한 권에 2박3일, 그것도 그 시간을 모두 바쳐 읽은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다. 장장 774페이지에 이르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지만, 읽으면서 한 순간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남은 책장이 얼마 되지 않을수록 도대체 사건이 어떻게 풀려갈 것인가에 대해 신경이 곤두섰다. <코난 도일과 찰스 디킨스가 극찬한 서양문학사 최구의 추리소설!>이라는 선전문구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있는 이 작품, 표지부터 유독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흰 옷을 입은 여인] 이다.
19세기 영국, 화가인 월터 하트라이트는 친구의 소개로 리머리지 가(家)에서 그림을 가르치게 된다. 런던을 떠난기 전날 밤, 거리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알 수 없는 말들을 남긴 채 사라진다. 한편 리머리지 가에서 로라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월터는 그녀의 언니 마리안 할콤과 셋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로라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마리안은 로라의 월터가 떠나는 것이 로라의 행복을 위해 최선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떠나주기를 부탁한다. 사랑의 아픔을 뒤로 한 채 결국 영국을 떠나는 월터. 로라는 약혼자와 결혼하지만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그 시간 속에서 마리안은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월터가 만났던 흰 옷을 입은 여인이 자꾸 로라의 곁을 맴돈다.
작품은 기존의(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추리소설이 진행해가는 방식과는 달리 꽤 복잡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나뉘어진 세 부분도 각기 다른 사람의 시각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때로는 월터가, 때로는 마리안이, 그리고 작품에서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내용이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마지막의 사건 해결에 모두 중요한 힌트들을 제공하고, 이 작품을 통해 생명을 부여받은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책이 아니라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추리와 사건 해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는 하나, 작가가 그리는 당대의 묘사는 감탄할만하다. 19세기 영국의 계급제도, 상속제도, 결혼제도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 한 권의 책에 모두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타임스가 극찬한 것처럼 서스펜스, 공포, 사랑, 미스터리, 탐욕, 광기, 용기 등의 모든 감정들을 맛볼 수 있는 축제의 장을 선사했다. 세심한 인물묘사, 풍경묘사, 심리묘사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한층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악당들에게 숨겨진 음모가 무엇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추리를 하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흰 옷을 입은 여인에 의해 조성되는 음울하면서도 안타까운 분위기를 느끼고, 과연 어떠한 세계로 우리들을 이끌어줄 것인가를 기대하고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100년이 넘어도 변하지 않는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는 이 작품, 오늘 밤 꼭 만나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