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악녀
페이 웰던 지음, 김석희 옮김 / 쿠오레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학교 다닐 때 교양과목 중 '여성학'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나는 전공 수업에 부전공 수업까지 있어 교양과목 이수를 많이 못했지만, 어느 날 그 수업을 들은 친구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쉬는 시간에 한 여학생이 여성용품을 숨겨 가지고 가는 모습을 교수님이 보셨어. 쉬는 시간이 끝나고 교수님이 그러시는 거야. 왜 그걸 그렇게 숨겨서 가느냐고. 월경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이런 것이 페미니즘이란 건가'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즘. 여성 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 또는 그 이론을 일컫는 말.  페미니즘을 생각할 때마다 종종 그 이야기가 생각나곤했는데,  웹진 <페미니스타>에서 선정한 '20세기 여성작가 소설 100선'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이 작품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사뭇 궁금했다. 

커다란 키에 둥글둥글한 몸매, 매부리코와 튀어나온 턱, 움푹 들어간 눈을 가진 거대한,  표지의 왼쪽 여자는 우리의 주인공 루스다. 회계사로 성공한 남편 보보는 자신의 고객이 된 로맨스 작가 메리 피셔와 사랑에 빠지고 끝내는 루스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그 동안 착하게 살아오려 했던 루스는 악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복수를 위해 자신의 외모를 하나씩 하나씩 바꾸면서 보보와 메리 피셔를 궁지로 몬다. 회계장부를 몰래 조작하고, 요양원에 가 있던 메리 피셔의 어머니를 손을 써서 집으로 돌려보내버리고, 나중에는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해낸다. 

요즘 TV드라마에서 자주 다루고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불륜'이다. 남편은 바람을 피워  내연녀와 결혼하겠다며 큰소리 탕탕 치며 집을 나가 버리고 남겨진 조강지처는 괴로워한다. 하지만 버려진 그녀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반면, 사랑을 부르짖으며 떠난 남편은 결국 후회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에덴의 악녀]를 그런 드라마와 동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드라마 주인공들은 꾸미기만 하면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지만, 루스는 아무리 꾸며도 그녀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루스가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혀 통쾌함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안타깝고 쓸쓸한 느낌이 짙다. 남편을 잃고 아이들을 내버려 둔 채 악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의 마음이 아프도록 전해졌기 때문일까. 

외모지상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모습에서 과연 페미니즘적 성격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루스의 모습이 현재 겉모습에만 끌려 인스턴트식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꾸짖는 듯 하다.  외모, 아름다움. 물론 중요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많은 남자들은 루스가 변화를 꾀하지 않아도 그녀의 현명한 조언과 따뜻한 품성에 이끌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루스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단 한 명의 남자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매력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구는 그것이 바로 그녀의 비극이었음을 시사한다. 

하느님이 주신 몸을 스스로 개조하여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루스는 스스로를 악녀라 지칭했다. 악녀는, 되어도 좋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악녀이어야 한다. 시덥잖은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간과하고 진행하는 악녀로의 변신은 하나마나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적 요소도 드러내지만, 사랑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한다. 사랑, 아름다운 말이지만 남을 아프게 하면서 진행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 마음에 못 박으면 자기 눈에서 피눈물난다는 이론을 나는 믿는다. 우정 뿐만 아니라 사랑도 의리다. 그런 점에서 루스의 남편 보보는 정말 실격이다. 메리와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루스에게 보고하면서 성적 만족을 얻지 않나, 그래도 자기 아내인데 마음 아프게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당당하다. 그것은 그의 내연녀 메리도 마찬가지다. 루스의 복수가 으스스하기도 했지만, 그 복수에 시원함을 느꼈던 것은 너무 과도한 감정이입 탓인지도 모르겠다. 

심각한 사회문제를 통속적인 스토리로 추구하여 문학성과 오락성을 함께 갖춘 품격 있는 소설을 이루어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은 1986년 영국 BBC의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약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작품,  여성의 삶과 사회적 인식, 그리고 인간 삶의 중요한 가치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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