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삼킨 책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 지음, 신혜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 근거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이라는 책은 평범한 주부를 유명 작가로, 가난했던 소년을 백만장자로 변화시킨 책들을 소개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주인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한 권의 책이었으며, 그 책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요즘에야 방송과 인터넷이 무한발전하여 책이 갖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의 작품에는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세상을 삼켜버릴만한 한 권의 책이 등장한다. 

때는 1780년, 수많은 제후국들로 분열되어 있고 이성과 종교가 맞서 싸우는 독일에서의 일이다. 질병에 관해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려던 젊은 의사 니콜라이는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다가 고향에서 쫓겨나고 만다. 새로운 보금자리 뉘른베르크에서 의사의 조수로 생활하던 그에게 어느 날 괴이한 사건이 벌어진다. 왼쪽 폐엽에 부종이 발견되고, 심장에 심한 압박을 느껴 죽었다고 추측되는 알도르프 백작의 시신.  시신의 상태를 조사하던 니콜라이는 우연한 기회에 독일 곳곳에서 벌어지는 우편마차 화재 사건 수사를 젊은 수사관 디 타시와 조사하게 된다. 연결되어 있지 않을 것만 같던 우편마차 화재 사건과 알도르프 백작과 그 일가의 죽음, 그리고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은 점차 하나의 점으로 모이고,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 그의 눈 앞에 펼쳐진다.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것치고는 추리소설적인 면은 약하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지만 니콜라이와 그의 연인 막달레나의 대화는 충분히 철학적이다. 처음에야 이들이 하는 대화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드러나는 작가의 생각에 놀라게 된다. 생각은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을 통과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이것이다. 과연 하나의 사상이, 생각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가. 이성적인 니콜라이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지만, 막달레나는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사상이 있으며, 그러한 사상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충분히 걸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세상이 계속 변화하는 한 '세상을 삼킬'만한 책들은 앞으로도 종종 나오지 않을까 싶다. 다만, 사상적인 면에서는 잘 모르겠으나, 사람이 생각에 의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은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향수병이나 상사병 등과 같은 마음의 병에 이름을 붙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정신을 관장하는 분야의 의학이 발달하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칸트의 사상, 그리고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은 책의 거의 마지막에 다다르고나서야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칸트' 하면 정확한 시간지킴이라는 인상이 강하여, 이 책을 통해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으나 그에 관한 언급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의 배경이 되는 때의 독일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재미가 있다. 

 초반에 다소 지루한 면도 없지는 않으나, 그 순간을 잘 참고 견딘다면 약간은 오싹한 철학의 세계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표지부터 책의 마지막 장까지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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