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티 잡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능력을 인정받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여성들을 '알파걸'이라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알파걸'이라는 단어를 대할 때마다 나는 어쩐지 소외감을 느낀다. 나는 나의 단점과 부족한 점을 잘 알고 있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 힘에 부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에 빠지면 그것에만 몰두하게 되는 나에게 '알파걸'이라는 이름은 맞지 않은 옷은 것처럼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여기에 절대 알파남성이라고 할 수 없는 베타 남성이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잘난 외모를 갖춘 엘리트인 알파 남성을 제외한 나머지 부류를 뜻하는 베타 남성, 찰리. 

미래에 대한 희미한 불안감에 늘 온갖 상상을 구비해놓고 있는 찰리는 그 자신부터 행운이라 부를 정도의 아름다운 아내 레이철과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레이철이 그들의 아기를 낳은 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찰리는 보았다. 레이철 옆에 서 있던 어떤 흑인 남자를. 돌연 사라져버리고 CCTV에도 찍히지 않는 불가사의한 남자를 말이다. 레이철만이 삶의 이유라 생각하던 찰리는 끔찍한 불행 앞에서 오직 딸 소피만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다. 그 와중에 그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골동품 가게를 하는 그 앞에 물건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이고,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이름을 순간적으로 알게 된다. 또한 수첩에 정체 모를 이름과 숫자들이 나타나고 주변에서 자꾸 사람이 죽는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수거하여 원활한 윤회를 돕는 '더티 잡'에 채용된 것을 알게 된 찰리. 자신의 몸과 딸아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그에게 내려진 엄청난 임무를 그는 과연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베타 남성이라 불리는 찰리는 어쩐지 나와 비슷하다. 소심한 탓인지, 아니면 그저 미래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고 싶은 것인지 나 또한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을 상상하고 혼자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한다. 자신을 무척 괴롭히는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또한 나를 강하게 지켜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마음의 준비랄까. 그러나 찰리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 나는 신경쓰이는 것과 신경쓰이지 않는 일이 구분되어 있지만, 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의 모든 일에  안테나를 세우고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며 온갖 상상을 다한다. 초반에는 나와의 동질감을 느끼며 공감하기도 했지만, 그런 찰리의 모습에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심지어 '이봐, 너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어. 좀 더 진중하게 행동하란 말이야'라는 호통까지 치고 싶어졌다. 

'정신없이 웃기다가도 가슴 저리도록 슬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쾌한 이야기'라는 문구에 엄청난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와는 약간 맞지 않는 책이지 않았나 싶다. 죽음과 영혼의 윤회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충분히 녹여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찰리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수다스러운 상상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어째서 찰리의 귀여운 딸 소피를 표지에서 해골로 묘사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