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연민. 제목부터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만약 그 위에 부제처럼 적힌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이라는 문구가 없었다면 그렇게 강렬한 느낌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동정심,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추운 겨울 지하철역 입구 계단에 손을 벌리고 앉아있는 아기엄마나, 커다란 가방을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비틀비틀 걷고 있는 노인분들을 볼 때 내 마음이 꼭 그랬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그 모든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로 yes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감정이 향하고 있는 사람의 모든 것을, 그 사람의 온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연민이냐 사랑이냐의 차이는 그것이 아닐까. 

허울 뿐이고 자기만족적인 감정은 결국에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입힌다. 이 작품의 주인공 호프밀러의 불행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군인이었던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용감하다고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사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은 '나' 가 그의 이야기를 옮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호프밀러는 새 주둔지에서 우연히 케케스팔바라는 귀족을 알게 되었다. 케케스팔바에게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딸, 에디트가 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파티에서 에디트에게 춤을 청한 호프밀러는 사죄하기 위해 꽃을 들고 찾아간 것을 계기로 매일 오후 시간을 그녀와 그녀의 사촌 일로나와 함께 보내게 된다. 오직 연민이라는 감정 하나로 저택을 방문하는 그에게 에디트는 사랑을 느끼고 치료에 적극적으로 매달리지만, 호프밀러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게다가 케케스팔바마저 딸 곁에 머물러주기를 간청하는 상황 속에서 호프밀러는 명예와 희생, 그리고 연민이라는 복잡한 감정 안에서 괴로워한다. 결국 망설이고 에디트의 사랑을 모욕한 그 앞에 떨어진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전부 망쳐버렸다는 죄책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도움을 준 이는 나에게 대부분 고마워했고, 나도 도움을 줌으로써  '누군가에게 내가 쓸모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섣부른 동정과 위로는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에디트에게 있어 호프밀러가 그랬다. 그녀는 사랑이란 감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와주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상대는 오직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호프밀러가 애초부터 책임지지 못할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에 취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케케스팔바 노인을 웃게 만들 수 있고, 자신의 방문이 한 소녀에게 기다림과 설레임을 가져다 준다는 그 사실에 그는 완전히 빠져 있었다.  도움을 베풀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것인가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호프밀러의 경우처럼 어설프게 베풀었던 친절이 화살이 되어  '무거운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되돌아 올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프밀러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 모두 어쩌면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것이지만 정작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일테니까.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렇게 어렵고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해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준 슈테판 츠바이크.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갈수록 그 죄가 잊혀질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의 양심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마지막 부분은 정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을 해부당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때 어땠나, 내 자신의 감정에만 빠져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어느 순간에는 호프밀러가 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에디트가 되어 책을 손에 쥔 순간부터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지 않았다. 향할 수가 없었다. 추리소설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한 분위기와,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면서 숨가쁘게 읽어내려간 [연민].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대해 오래도록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연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느낀 괴로운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 욕망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기도 합니다만-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 연민은 인내하며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칠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임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때에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희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