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보면, 뭔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걸까를 생각하며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책이라면 그냥 탁 덮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책은 그러기도 쉽지 않다.  소리가 잘 안 들려서 답답하지만, 그 나름의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흑백 무성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모스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살인현장에서 물을 달라는 생존자의 말을 뿌리치고, 그 곳에 있던 거액의 돈가방을 들고 자리를 피한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모스가 하룻밤이 지나 물을 가지고 살인현장을 다시 찾지만 이미 생존자는 목숨을 잃은 뒤다. 돈가방을 노리고 살인자가 자신을 뒤쫓고 있음을 느낀 그는 아내에게도 몸을 피하게 한 뒤 이 곳 저 곳으로 피신하지만 살인자의 그물망을 피할 방법은 없다. 다른 한편에는 경찰을 죽이고 도주한 살인자 시거를 쫓는 보안관 벨이 있다. 모스가 살인자에게 쫓기고 있음을 안 벨은 어떻게든 모스를 도와주고 싶어하지만 잔혹한 시거를 멈출 방법이 과연 그에게 있을까. 

거의 모든 스릴러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킬러에게 쫓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조금 색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을 달라는 생존자의 말을 못들은 척 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돈가방을 훌쩍 들고 떠나버린 모스는 결코 선인이라 불릴 수 없다. 오히려 비양심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며 킬러인 시거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잔혹하다.  모스가 시거에게 쫓기게 된 불행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경찰에게조차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의 분위기는 더욱 숨가쁘다. 난무하는 총싸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살려두지 않는 시거의 냉혹함 앞에서 과연 모스가 위기를 뚫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중간중간 그 긴장감이 실이 끊기듯 툭 풀려버리는 순간이 있다.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문체가 진행되다가 벨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부분이다. 한 쪽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숨이 가쁜데 벨은 테이프가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느릿느릿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일상생활을 털어놓기도 한다. 벨의 존재는 이 작품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벨과 시거를 선인과 악인이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계속 괴로워하는 벨은 전세대(혹은 노인), 양심의 가책도 죄책감도 없이 동전으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거는 현재의 세대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이제 학생들이 숙제를 안 해오거나 복도에서 뛰는 것 같은 소소한 일이 아니라 약물중독, 살인, 강간, 낙태 등의 끔찍하고 비인륜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작품이 나타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인간적이고 양심적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시거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세상은 더 이상 벨이 존재하고 싶어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이미 세상에 그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대화를 나타내는 따옴표도 하나 없이 줄줄  문장이 나열된 책은 참 읽기가 힘들었다. 보통 책들과는 달리 내면묘사가 적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의 황폐함과 몰인정성을 그리기에 훌륭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황량한 분위기를 잘 살렸는지 궁금해진다. 언젠가 조용히 이 흑백 무성영화같은 책을 다시 펼치고 진정한 '노인을 위한 나라'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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