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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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의 내 가장 큰 궁금증 중 하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이름들의 기원'이었다. 책상은 왜 책상이고, 의자는 어째서 의자이며, 하늘은 무슨 이유로 하늘로 이름 붙여진 것인지,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고  지금도 도저히 풀 수 없는 신비라고 생각한다. 각 사회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자의성'으로 설명된다. 자의성이란 강아지를 우리는 강아지로 부르고 영어에서는 Dog, 일본어로는 いぬ(이누) 라고 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즉 뜻과 기호 사이에는 필연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일반명사 뿐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서 부르고 불리는 이름 또한 그러하다. '이름'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이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주인공 주제씨는 중앙 호적 등기 보관소에서 일하는 사무보조원이다. 52세를 앞두고 있는 그는 낮에는 등기 보관소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등기 보관소 옆에 붙어있는 작은 집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데, 남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취미를 하나 가지고 있다. 유명 연예인들의 기사들을 스크랩하는 일이 그것인데, 어느 날 주제씨는 추기경의 기사를 스크랩하다가 그가 세례받은 성당, 대부 등의 기록이 알고 싶어 한밤중에 등기 보관소에 잠입한다. 그 과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한 여인의 기록을 같이 가져오게 된 주제씨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집을 찾아가거나 그녀의 대모를 만나기도 하고, 한밤중에 그녀가 다닌 학교에 몰래 들어가 기록을 빼내오기도 했다. 비를 맞고 독감에 걸리고 사람들의 미심쩍은 눈초리를 견뎌내면서 주제씨는 힘들게 힘들게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그녀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다는 것을 알아내고야 만다. 

'그녀'의 행적을 찾아가는 길이 주제씨에게 왜 그리 중요했던 것일까. 사실 주제씨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작품 안에서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녀 뿐만 아니라 주제씨의 주위 사람들인 등기 보관소 소장, 조사를 하다 만난 1층에 사는 노부인, 세탁소 주인, 직원들의 이름은 한글자도 나오지 않고, 심지어 주제씨까지 그의 풀네임이 아닌 그저 '주제씨'라고만 명기되어 있다.  작가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단어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쓸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 발견(!) 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름은 우리 삶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제일 처음 하는 일이 명함을 교환하는 것이고, 자기 소개를 할 때 먼저 하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일이다. '이름'이란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고, 그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무게감있게 다가가는 일종의 도구로 사용된다.  하지만 도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의미가) 되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어쩐지 이 시가 계속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가 나에게 와서 꽃이 된 것'처럼, 이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 관심과 애정의 표현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은 것은, 그들 사이가 그만큼 삭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때가 되면 출근하고, 밥을 먹고, 몇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 회색빛 도시를 연상시킨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이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라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혹은 '관심이 없다'라고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알지 못하는 여인의 행적을 조사하는 주제씨의 좌충우돌 조사기록 과정은, 자신의 고독을 나타내는 몸부림, 혹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어지지 않는 노력처럼 보여 안타깝다. 

사실 책의 내용을 100%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직도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어디서 찾아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게다가 긴 문장과 쉴새없이 이어지는 쉼표들의 나열은 그의 작품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나를 충분히 당황스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라는 글자가 마음과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간이 지나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그리하여 내 존재를 기억해 줄 이가 이 도시에 한 명이라도 있을 것인지 문득 두려운 기분이 엄습한다.



이 사람아,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웠듯이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둠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배워야 해.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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