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암스테르담]으로 발을 내딛었고, [속죄]를 통해 푹 빠져버린 작가 이언 매큐언은, 책을 읽을 때마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다. 작가 본인은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툭툭 던져놓는 화제들이 사실은 우리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가슴 절절함을 느끼게 만드는지 그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은 '이게 뭐야'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그의 세계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는 느낌을,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번번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서머싯 몸'상을 수상했다는 이 작품집은 나뿐만 아니라 그의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이 틀림없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편안하지 않다. 편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쾌하고 끈적끈적하고 읽고 난 순간 내 몸 어디 한 군데가 아파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첫사랑이라는 단어와 표지의 여성 때문에 아련하고 몽실몽실한 사랑의 느낌을 생각했다면 기대와 크게 어긋날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영상 뿐 아니라 글자에서도 자극에 약한데,  글자를 따라가며 잔인하거나 충격적인 장면을 상상하다 보면 꼭 울렁증이 느껴진다. 그렇게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작가가 한 명 있는데 그는 일본작가 '기리노 나쓰오'다. 이번 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기리노 나쓰오' 정도는 아니었지만, 읽고 있다보면 어쩐지 어둠에 내 몸이 잠식당하는 기분이 들어 참 힘들었다.는 것은 밝혀둔다. 

8편의 이야기는 작가의 개성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냉소적이고, 저 위에 우리들 머리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에서 혼자 의자에 앉아 놀라고 불쾌해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낄낄대고 있을 듯한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의 이런 모습이 이리도 쉽게 상상되면서도 멀리 피해가지는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러한 분위기는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희소성을 중시하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증조부의 일기를 바탕으로 존재를 사라지게 만든다는 입체기하학, 근친상간을 그리고 있는 가정처방, 어느 여름날의 사고를 평화로운 수채화처럼 그린 여름의 마지막 날, 단어를 사용한 유희 극장의 코커씨, 살인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묘사한 나비, 벽장 속에서 살게 된 남자의 생의 발자취를 그린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 청소년들의 사랑이야기지만 어쩐지 쓸쓸함과 고독감이 느껴지는 첫사랑 마지막 의식, 그리고 가장무도회까지 읽고나면 몸서리쳐지는 이야기들로 가득찬 이 작품집은, 그러나 결국에는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완성되지 않은 인격체들이 겪는 혼란스러움이 때로는 경악으로, 때로는 잔잔하게 다가오면서 감정의 이쪽과 저쪽을 자유롭게 넘나드게 만드는 그에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집이 발간되었을 때 영국의 '옵서버'지는 구식 안경을 걸친 이언 매큐언의 지적인 용모를 빗대 '학교 선생처럼 생긴 사람이 글은 악마처럼 쓴다'라는 글을 실었다고 한다. '악마적인 글쓰기'. 그에게 이렇게 어울리는 수식어가 또 있을까. 악마처럼 우리를 자신의 글세계로 끌어들이고, 우리의 경악과 당황스러움에 그 어떤 대답 없이 침묵하는 이언 매큐언. 그래, 한 번 빠져든 이상 내 당신의 작품은 피하지 않고 읽어드리겠소~!!  그가 다음에는 어떤 주제로 나를 끌어들여 놀라게 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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