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윤지강 지음 / 예담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허난설헌. 허초희.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홍길동전]을 지은 조선시대의 작가 허균의 누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그녀가 황진이에 버금갈만큼 시에 있어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지금까지 황진이에 대한 영화나 책들이 쏟아져나왔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그저 조용히 묻혀 있었다. 책을 읽고나니, 어쩌면 그렇게 묻혀 있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의 의지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필요로 했던 것은 시와 자유로운 생활, 그리고 평범한 사랑이었으므로. 먼 옛날 여자로 살아가기 힘든 이 조선 땅에서 그녀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시인이었다. 

한국 땅에서 여자로 살아가기란 지금도 보통 일이 아니다. 예전보다 남아선호사상도 줄었다고 하고, 맞벌이 하는 부부며 집안일을 하는 남성도 증가했지만 여자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자는 밖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얻는 대신, 집안일도 능숙하게 해내야 하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이런 한국보다도 유교사상이 팽배하고, 여자는 남편을 잘 모시고 아이를 잘 키우고 조상님 제사를 잘 지내는 것만이 삶의 의미가 되었던 조선 땅에서 허초희는 태어났다. 여타의 남성들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재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 삶의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으므로,  자신조차 그 영혼을 억누를 수 없었으리라. 

한 때는 그녀도 소소한 삶을 꿈꾸었다. 비록 어린시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정인이 소식 한 줄 없이 자신을 떠나가버리고, 권력의 이해관계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녀 또한 그저 한 사람의 여성이었다. 꽃길을 산책하다가 춘풍에 취해 꽃가지를 꺾어들고 꽃이 더 예쁜가요? 내가 더 예쁜가요? (본문중) 라며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내보이고 싶어했던  어여쁘고 어여쁜 여성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고,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호되고, 그나마 마음붙이고 살았던 아들과 딸을 갑작스럽게 잃게 된 때부터 조상을 모시고 대를 잇기 위해 억지로 임신을 하는 것은 그녀의 삶을 더욱 고달프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가 필요해졌다. 시의 세계, 자유로운 영혼의 세계가. 하지만 완고한 남자들은,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남자들은 그런 허난설헌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녀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려고만 했다. 결국 그녀는 떠나가고, 세상에는 그녀의 재능을 먼저 알아차린 중국인 주지번에 의해 [난설헌집]이란 책이 남았다. 그리고 내 앞에는 그녀의 생을 그린 이 붉은 책 한 권이 있다 .

붉은 색에 이끌려 접한 책이었지만, 이제는 이 붉은색이 그녀의 강렬하지만 짧은 생을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쓰리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삶이 너무 안타깝고, 조선의 남자들은 어리석어 보여서 슬프면서도 화가 났다.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허난설헌, 그녀를 알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책 속에 실린 그녀의 시들은, 시에는 문외한인 나의 마음을 톡톡 두드렸다. 한 편 한 편의 시를 적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 앞에 훤히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조선의 시대상과 그녀의 삶을 적절히 조화시킨 멋진 작품을 한 권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허난설헌, 이름만 알고 있었던 그녀가 오늘밤 실체를 가지고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었다.



시는 그렇게 왔다.

울남한 바닷물 위로 쑥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잉걸불 속에서 빨갛게 타올라 화로의 재 속에 간직되던 불씨처럼,

어머니가 좋아하던 접중화처럼,

기름진 땅을 두고 푸석거리는 모래밭에 피던 바닷가의 해당화처럼,

어부의 배에 실려 오던 펄떡거리는 물고기처럼,

물고기 눈을 감고 있던 짙푸른 해초처럼,

그것들은 어느 날 초희의 영혼에서 시로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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